남강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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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남강 이승훈에 대하여
남강 선생 존영 (1864 - 1930)
1. 남강 이승훈의 생애
가. 유년기(幼年期)
가난 속에서도 지식과 학문을 쌓고 기업 경영의 기본 이론을 익히고 성장하여, 성인이 되었을 때를 대비한 착실한 준비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1864 (출생) : 3월 25일 (음 2월 18일) 평안북도(平安北道) 정주(定州)에서 출생. 8개월만에 모친 별세
1869 ( 6세) : 정주(定州)에서 납청정(納淸亭)으로 이사를 하고 7세부터 11세까지 서당에서 한문(漢文)을 배웠다. (동몽선습, 무제시, 소학, 맹자 등)
1873 (10세) : 아버지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고아가 된 남강는 학업을 중단한 채 생계를 꾸려야 했다.
1874 (11세) : 남강은 14세까지 임일권의 집에서 있었는데 임일권은 유기 상공업을 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여기에서 유기 제조공정과 상업 경영의 거래 기술을 익혔다. 또한 이곳에서 그는 성실과 정직함을 인정받아 수금원의 직책을 맡기도 했다.
나. 사생활(私生活)의 성공
이 시기에는 보부상을 시작으로 유기 공장 운영과 판매, 무역상과 운수업을 하는 등 그의 경영능력과 성실성을 충분히 발휘하여 재게에 이름을 떨쳤다. 즉, 개인 남강(南岡)으로서 그의 기업 능력을 통하여 대성한 성취의 시기였다.
1878 (15세) : 그는 이도제의 딸인 이경강씨와 결혼을 하고 자립하여 보부상으로 장사를 시작했는데, 특히 남강(南岡)은 이 시기에 정주와 황해도를 돌아다니며 장사뿐아니라 자연과 지리에 대한 견문도 익히며 여러 사람을 사귀었고 나라 안팎의 소식들도 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정주, 납청, 고읍에서 장사를 하다 점차 평안도 일대를 다니게 되었고 나중에는 황해도의 안악,재령,봉산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23세까지 보부상으로 착실한 기반을 닦았다.
1887 (24세) : 보부상을 청산하고 납청정(納淸亭)에 들어와서 오희순(吳熙淳)이라는 유지의 도움을 받아 유기 공장과 상점을차려 사업을 시작했으며, 서울과 평양을 왕래하면서 상점 경영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남강의 유기 공장은 환경 조건이나 노동자 처우에 있어서 매우 모범적이었기에 타 공장과 비교되기도 했다. 한편, 오산(五山)의 용동(龍洞)에다 이(李)씨의 친족촌을 만들고 서당을 마련하여 자제들의 교육에도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1894 (31세) : 청일전쟁(淸日戰爭)이 일어나자 일본과 청나라의 전쟁터가 되었던 황해도와 평안도는 이들에 의해 폐허가 되었고, 남강도 힘 없는 나라의 백성이었기에 그동안 쌓은 노력은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그러나 그의 신용과 정직함을 아는 오삭주(吳朔州=오희순)의 계속적인 도움으로 이듬해에 재기하였다.
1898 (35세) : 청일전쟁(淸日戰爭)후 5년만에 그는 벌써 평양에 큰 상사를 다시 개설하고 납청정(納淸亭)과 진남포(鎭南浦) 등에 지점을 두었으며, 서울과 인천을 통하여 외국과 거래하여 국제 무역상으로 자리를 굳혔다. 南岡은경인선(京仁線)을 비롷산 철도의 개통과 외국 상선이 입항할 것을 미리 알아 운송 사업을 개시했는데 서울과 평양에 설립한 운수회사는 우리 나라 운송 사업의 시초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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