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이승훈의 생애와 교육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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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이승훈의 본명은 인환이고, 자가 승훈이며, 호를 남강이라 하였고, 어릴 때에는 승일이라 불렀다. 그는 1854년 4월 25일 평안북도 정주읍 내의 조그마한 오막 살이 초가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석주 어머니는 홍주 김씨인데, 그들의 둘째아들이었다. 비록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는 경서를 읽었고, 글씨도 썼다. 하지만 그는 출생 후 8개월만에 어머니를 잃고, 불과 10세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11세가 되던 해 임일권 상점의 사환으로 들어가 그 곳에서 많은 상인들과 접촉할 수 있었고, 또한 이들로부터 당시의 정치, 사회, 경제 및 사상적인 움직임을 알게 되었다. 일을 하며 소학, 맹자 등을 읽었다. 여기에서 모은 돈으로 유기상점을 독립 경영하다가 1899년 용동으로 이사하여 승천재를 세우고 동네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는 점원, 보부상, 좌상, 무역상을 하면서 산업을 일으키는 것이 나라가 살길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러나 1907년 평양에서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듣고 향리로 돌아와 강명의숙 이라는 소학교를 만들어 신교육을 하는 한편 오산학교를 창립하였다. 1911년에는 남만주 무관학교 경영사건, 105인 사건,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다. 그의 나이 60세인 1923년에 동아일보 사장으로 있다가 다시 오산학교를 위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1930년 5월 9일 67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그의 유언에 의하여 유해를 경성 대학병원 의학부 해부실 주임교수에게 맡겨 해부케 하였으나, 총독부의 금지명령으로 표본을 완성치 못하고 같은 해 10월에 반골되어 왔으므로, 정주 오산 성현동에 안장하였다.
2.남강 이승훈의 교육사상
1) 민족교육 진흥사상
남강 이승훈의 대표적인 교육사상은 교육을 통한 민족진흥 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한말 국권회복운동은 무장투쟁노선과 실력양성운동 노선을 각 채택한 의병운동과 자강운동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특히 자강 운동이란 한국 민족이 주체가 되어 교육과 실업을 진흥함으로써 경제적, 문화적인 실력을 양성하고 나아가 부국강병을 달성하자는 운동이였다.
결국 이러한 자강운동은 애국계몽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남강은 이러한 계몽운동에게서 큰 영향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교육진흥사상은 도산 안창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며, 1907년 그의 생을 뒤바꾸어 놓은 평양에서의 안창호의 강연 역시 교육진흥론에 관한 것이였다. 안창호의 강연을 듣고 크게 감명받은 남강은 강연이 끝난 후 안창호와 함께 나라의 장래와 교육의 일을 놓고 심도깊은 논의를 하면서 이승훈은 그의 평생 교육진흥사상을 통한 민족 계몽에 앞장설 것을 다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우리가 살아갈 길은 교육을 통하여 힘을 길러 나가는 데에 있다"는 말을 언제나 외우고 다녔으며 대중 앞에서 이야기할 때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곤 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고 한다. 한편 그는 민족의 진흥을 위해 신학문을 도입할 것을 결심하였으며 처음세운 강명의숙에서부터 신식교육을 가르치게 하되 처음부터 과목은 산수. 체조. 수신. 역사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당시 그는 다른 민족사학들과 함께 서양식 교육내용, 즉 자연과학 과목(물리, 화학, 생물, 수학, 산술 등)과 사회과학 과목(법학,경제학, 지리, 역사, 정치학)을 도입하였던 것이다. 그의 교육진흥사상으로 말미암아 오산학교는 독립운동의 산실이 되었으며 졸업생들의 면면 역시 주로 독립운동가, 교육자, 사상가, 종교인 등으로 일제와 결탁하지 않았던 인물들이 되었으며 독립운동의 핵심 지도자들로서 세워졌던 것이다.
2) 기독교 교육 사상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나라를 빼앗긴 것에 대해 몹시 괴로워하던 남강은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한석진목사의 십자가의 고난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듣고 큰 감동을 얻게 되었다. 그후 그는 학교로 돌아와 교직원과 학생들을 모아놓고 예수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학교에서 신앙집회 갖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는 민족 전체가 다시 힘을 얻고 하나될 수 있는 계기가 바로 헌신, 봉사, 사랑을 강조하는 기독교정신으로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해 12월 학교의 교육주지를 기독교 사상에 근거하여 바꾸면서 라부열(Slacy L. Robert)목사를 교장으로 추대하고 성경과목도 가르치게 되었다. 비록 1922년 일제의 신교육령에 의거하여 1923년 11월에 기독교 교육주지는 삭제되고 일반학교가 되었으나 학교안의 신앙집회와 기도하는 분위기는 계속되었다. 한편 남강은 기독교정신을 바탕으로 경,애,성(敬愛誠)을 교육의 목적으로 삼았는바 하나님을 공경하고 스승을 공경하며(敬), 민족을 사랑하고 국가를 사랑하며(愛), 진실하고 성실하게 거짓이 없이 사는 삶, 또 이를 따르는 학생들을 기르는 것(誠)을 교육의 목적으로 삼게 되었다. 그가 강조한 의(義)의 교육은 기독교 사상에서 잘 나타나는데, 교육과 관련된 신앙의 형태로 이를 강조하고 의가 아닌 거짓이나 게으름이나 이기심이나 권모술수나 아집을 버리고 항상 큰 뜻 속에서 행하고 배우고 생활하도록 가르쳐 준 것이다. 남강은 그의 교육의 방향성을 기독교 사상으로 귀결시켰기에 기독교 교육을 실천적으로 수행한 인물로 평가받게 된 것이다.
3) 실천교육 사상
남강은 어려서부터 남의 심부름꾼이 된즉, 주인이 시키기를 기다릴 것 없이 자신의 일을 실천적으로 성실하게 감당했던 사람 이였다. 그는 사람이 되고 나라를 사랑하는 길은 큰일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극히 예사로운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하였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 뜰을 쓰는 것, 각각 자기방을 치우는 것, 교실을 깨끗이 쓸고 정돈하는 것 등 이 모든 작아보이는 실천적인 일이 실은 나라를 사랑하는데 통하는 길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는 말로써만이 아니라 이러한 일련의 일들을 날마다 몸소 실천하였는데 특히 교실청소, 자기방 청소, 화장실 청소는 언제나 솔선하였고, 특히 남들이 싫어하는 화장실 청소는 옥(獄)중에서도 도맡아 했다. 그가 늘 주장했고 실천했던 사사교육 처처교장(事事敎育 處處敎場)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실천궁행의 교육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는 매사에 진실할 것을 마음먹고 교육의 현장속에서도 실천하였는바 마음과 몸을 다하여 일하여서 대중의 신망을 받는 지경에 이르는 진실한 진인이 될 것을 강조하면서 실천하는 교육자였던 것이다.
4) 산업교육 사상
남강의 실천교육사상은 산업교육 사상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는 그가 어렸을 적 유기상의 점원에서 유기행상공장 경영 등으로 대실업가로 성장했었던 과거 경험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그때 이후 남강은 민족의 자생을 위해 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힘은 산업의 힘으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때마침 덴마크 교육사조가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었는데 덴마크에서 그룬드비히에 의한 국민고등학교 교육이 나라를 일으켰다는 소문이 들려왔고 직접 덴마크를 다녀온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교육의 성과가 보고되었던 것이다. 이에 남강은 소학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실천주의가 존중되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덴마크의 교육사조를 따라 농민학교와 공동체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남강은 오산학교와 신천농민 학교간의 자매결연을 추진하면서 학교재단이 경영하는 직조공장과 제사공장과 연계하여 오산일대를 새로운 교육도시로 만들기로 계획한후 농촌과 도시가 연결된 전원도시로서 오산에 학교와 교회와 도서관을 중앙에 두고 공장이 교외에 위치하며 그 사이를 푸른 마을로 메꾸는 일을 진행하기로 다짐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교회, 학교, 산업을 공동전선으로 파악하고 서로 유기적인 교호작용에 목적을 두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산업교육사상에 근거한 구체적인 종합계획은 결국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5) 평생 교육 사상
남강은 어릴 때에 조금 배운 한학외에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지 가르쳐 달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였고, 실제로 남강보다 사회경험이 적거나 나이가 적은 사람일지라도 항상 그들에게 배우려는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들이 많다. 또한 52세의 나이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열심히 수학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신구약, 교회사, 교리문답, 설교학, 교회법, 한국사, 서양사 등을 배웠으며 거기에서 공부하는 이들이 오산학교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민족의 영적 지도자가 될 것을 믿어 한사람 한사람을 성심껏 대하고 지도자로서의 품격을 갖추며 살 것을 당부하면서 함께 공부에 정진하게 되었다. 특별히 그의 의 사상은 신학교때 부지런한 학습을 통해 터득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구약을 통해 하나님의 의에 굳게 접할 수 있게 되었고, 의를 향하여 "나음 나음 나아가라" "점진적으로 나아가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성장하고 발전해나갈 것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결국 계속해서 배움에 대한 노력을 늦추지 않고 부단히 배우며 살았던 그를 향해 사람들은 만년청년이라고 일컬었으며 쉬임없이 향상하고 끊임없이 진리와 정의를 추구하며 배우고 구현했던 인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한국교육사상가 평전, 이승훈의 생애와 사상,
남강 이승훈 선생 연보 및 자료(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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