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이승훈의 교육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15.06.27 / 2015.06.27
  • 6페이지 / fileicon hwp (아래아한글2002)
  • 평가한 분이 없습니다. (구매금액의 3%지급)
  • 800원
다운로드장바구니
Naver Naver로그인 Kakao Kakao로그인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이전큰이미지 다음큰이미지
본문내용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작고 힘없는 국가란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다. 깊게 고민 할 필요도 없이 미국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눈치를 보고,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고 망발을 일삼는 일본에게도 제대로 된 대항 한번 하지 못한다. 이 답답한 심정을 표출하지 못하는 이유가 약소국이라는 이유 때문 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가 해방되기 전이나 후나 대한민국은 그 입지가 좁은 것이 사실이다. 특히나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가 제 구실을 못하던 전근대 시기에는 간접적으로나마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비참함과 애절함을 새삼 느낀다.
이 시기에 이러한 상황을 직시하고 현실을 타개하려고 노력했던 교육사상가가 바로 남강 이승훈 선생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나라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교육이 먼저 바로 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개혁을 위해 학교를 세웠다. 민족의 일깨움을 위해 교육자가 되었다. 실업인 으로서 사업을 하던 그가 ‘교육입국’ 을 부르짖으며 교육자로서 삶의 방향을 달리 한 이유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가 굳이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왜 교육을 통해 나라를 세우려 했는지, 또한 그 노력은 어떤 식으로 행하여 졌는지, 결론적으로 어떠한 결과를 초래 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 남강 이승훈의 생애와 교육입국(敎育立國)
위인들의 삶을 가만히 살펴보면 대부분이 가난한 가정 속에서 고난과 역경의 연속인 현실을 딛고 일어나 자수성가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남강 이승훈 선생 역시 다를 것이 없는데 생애를 살펴보자면 참으로 사건 사고가 많다. 소년 시절에는 빈곤한 가정 속에서 자라 일찍이 아버지가 별세하고 그로 인해 학업을 중단한 채, 납청정의 상점에서 일을 하였다. 그의 나이 열 여섯 되던 해에 보부상으로서 자립생활을 시작하였는데 1898년에는 평양에 큰 상사를 개설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명실상부한 상계의 거물로서 전국의 경제권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무역에 있어서 차질이 생겨서 재산상에 막대한 손해를 보고 1905년 상계를 은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여기서부터 이승훈 선생의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1907년 그는 사회정세를 알아보기 위해 평양으로 나갔다가 마침 미국에서 돌아온 도산의 시국강연을 듣게 되는데 이를 통하여 나라사랑의 길이 무지한 백성을 깨우치고 청년들의 가슴에 민족의 얼과 혼을 심는 것이라는 것을 자각한다. 김선양의 저서 현대 한국교육사상사. 김선양 저서. 양서원 출판.
를 살펴보면 이런 일을 겪은 직후 이승훈은 단상 위로 올라가 도산의 손을 굳게 잡고 “참 좋은 말씀이요, 사람이란 옳은 말은 곧 행하는 것이 제일이요, 나는 곧 행하기를 맹세하는 의미로 머리를 깎겠소”하고 머리를 깎았다고 한다.
그 후 이승훈은 고난 중에서도 입신하여 실업가로서 국내 제일가는 무역상에서 민족 광복을 위해 몸과 마음을 불사른 교육가로 평생 그의 본업을 다한다.
그는 교육입국(敎育立國)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보여 주었다. “지금 우리나라 형편은 날로 기울어져 가는데 우리가 그저 남아 있을 수는 없다. 우리 선조들이 살던 땅, 우리가 자라난 고향, 이것을 원수의 일인에게 내어 맡긴다는 것이야 차마 할 수 있을 것인가. 총을 드는 사람, 칼을 드는 사람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한 것이 무엇이냐. 우리가 세상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를 모르고 있으니 그 사람을 깨우치는 것이 제일 급선무다.” 라는 대목을 보면 그의 교육입국에 대한 의지를 절실히 느낄 수 있다.
그는 제일 먼저 초등학교 기관으로 강명의숙을 세웠다. 그러나 강명의숙 만으로는 도저히 만족한 교육을 실시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중학교를 세우기로 결심하였다. 이것은 신식교육을 하여 어두운 민족을 깨우쳐서 일본을 막아내야 한다는 그의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리하여 향교재산을 접수하였다가 1907년 12월에 중학교를 시작한 것이 바로 오산학교이다. 이 오산학교는 남강 자신이 오직 평민의 민족애를 바탕으로 한 정열과 거시적 안목으로 세운 학교였다. 그의 교육적 사상은 모두 이 학교에 담겨져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 오산의 건학정신은 어디까지나 민족의 영광을 바라보고 내 자신의 덕과 지혜와 힘을 길러 나라에 봉사하자는 민족정신이었다.
● 교육입국론에 입각한 교육이념
그의 교육이념은 크게 세 가지 정도를 살펴볼 수 있겠는데 첫째는 정성(誠), 사랑(愛), 존경(敬)이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그가 실업가 시절 모든 일이 순식간에 망해버리게 되었다. 이때 그는 자본가 오삭주 에게 돈을 빌렸는데 이승훈 말고도 그에게 신세를 지고 장사를 하던 장사꾼이 수십이 넘었다. 전란으로 모두 허물어져 피난 갔다 와서 그것을 보상할 길이 없자 다른 장사꾼들은 어디론가 슬슬 숨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승훈은 달랐다. ‘남의 신세를 졌으면 갚아야 한다. 힘이 없어 못 갚을 경우에는 그 연유를 알려 라도 주어야 한다.’ 이렇게 결심하고 그는 상점이며 공장을 세밀히 조사하여 잔재품을 기입하고 빌려온 자본에 대한 손해액과 이자를 계산하여 자기의 총 부채액이 얼마라는 명세서를 만들어 철산 오씨 집을 찾았다. 오삭주는 남강을 반갑게 만아 주며 “내 돈 가져다가 장사하는 사람이 수십 명이 넘는데 이번 난리 후 모두 숨어버리고 그림자도 얼씬 하지 않는 거야. 자네는 찾아주는 것도 고마운데 이렇게 장기(掌記)까지 소상히 적어 왔으니 장사하는 사람은 이래야 쓰는 법이야. 장사하는 사람일수록 신의를 지키고 마음을 바로 먹어야 하거든” 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정성의 정신은 진실하고 성실한 면을 말한다. 남에게 거짓말하지 않고 떳떳하고 참되게 살아감이 그가 추구하고 가르친 첫 번째 이념 이었다.
그는 사랑의 정신 또한 중시 생각했다. 이 사랑은 첫째로 나라사랑으로서 31운동이나 신민회 자금 등 그의 사업은 돈을 벌기 위한 사업이 아니라 나라를 위한 사업이었다. 또한 많은 지사들이 나라를 등지고 망명의 길을 택할 때 그는 끝끝내 고국 땅을 지키고 독립 쟁취를 위한 교육사업을 계속 했었다. 둘째로 학생사랑이다. 오산학교의 교육은 24시간 전인교육이었다. 학교에서 가르치고 기숙사나 그 밖의 숙소를 교사들이 돌보아 주었다. 그는 그의 가족보다 더 학생들에게 세심한 배려와 사랑을 아끼지 않았다. 학생들을 한없이 사랑한 그는 마침내 임종에 있어서조차 자신의 유골을 매장하지 말고 박물표본을 제작하여 학생들의 교재로 사용하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자기희생 정신인 동시에 학생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서 나온 염원 인 것 같다. 셋째는 학교사랑이다. 남강은 학교를 무척 사랑하여 그의 전 재산을 학교에 바쳤다. 남강이 학교를 사랑한 것은 민족을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학교를 그의 사업으로 일으킨 것이 아니고 그의 의지와 사랑이 학교를 세우는 일로 나타났던 것이었다. 그러기에 오산학교는 그의 신념, 의지 자체였다.
자료평가
    아직 평가한 내용이 없습니다.
회원 추천자료
사업자등록번호 220-06-55095 대표.신현웅 주소.서울시 서초구 방배로10길 18, 402호 대표전화.02-539-9392
개인정보책임자.박정아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17-서울서초-1806호 이메일 help@reportshop.co.kr
copyright (c) 2003 reoprtshop. steel All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