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문 바람의 검 신선조 를 보고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15.03.29 / 2015.03.29
- 3페이지 / hwp (아래아한글2002)
- 평가한 분이 없습니다. (구매금액의 3%지급)
- 800원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1
2
3
추천 연관자료
- 본문내용
-
《바람의 검, 신선조》를 보고
《바람의 검, 신선조》는 단편소설집 철도원(1997년)으로 나오키상(直木賞)을 수상한 아사다 지로(淺田次郞)의 원작 『칼에 지다』를 영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서구세력을 등에 업은 존왕양이에 일본 막부정권이 흔들리던 시절에 등장한 시골 낭인(로닌) 집단인 ‘신선조’와 신선조의 무사 중 하나인 모리오카 번의 하급무사 출신 요시무라 칸이치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영화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하기에 앞서, 먼저 신선조(신센구미)와 요시무라 칸이치로라는 인물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신선조의 활동 시기는 서구의 개항 요구에 300여년을 이어온 일본 막부정권이 흔들리던 시절, 메이지 유신 직전의 시기이다. 흑선(黑船:일본 개화기 당시 일본의 개방을 요구하던 서구의 군함과 상선)의 도래에 의해 드러난 막부의 약함에 각지에서 불만세력이 늘어났고 존왕양이라는 대의명분아래 실권 없는 천황이 있던 교토에는 불만세력들이 우글우글 모여들기 시작했다. 때문에 당시 교토의 치안은 극도로 혼란했다. 이에 도쿠가와 막부는 치안 유지부대, 즉 ‘교토수호직’을 설치했다. 그리고 아이즈 번주 마츠다이라 카타모리에게 교토수호직이라는 직책을 주어 교토의 치안을 다스리려고 했다.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의 임명과 병행해서 막부는 로시쿠미도 모집했다. 그러나 로시쿠미의 대장과 막부 사이에 문제가 생겨서 루시쿠미는 해산되었다. 그 중에서 친쇼군을 외치며 따로 나와 교토에 남은 사람들이 시위관 관장 콘고 이사미를 중심을 하는 ‘임생낭사대(미부로시다이)’였다. 이때구성원은 콘도 이사미를 비롯한 세리자오 카모, 니이미니시키, 히지카다 토시조를 비롯한 13명이었다. 쿄토 수호직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이들을 고용해 교토의 치안과 반막파 과격인사들을 소탕하기 시작한다. 아이즈 번주의 지배하에 들어간 그들은 처음에 주둔한 장소 미부촌의 이름을 따서 ‘미부 무라 로시’라 했는데 후에 개명해서 ‘신센구미’라고 하였다. 이후 추가모집으로 긴키 지방 일대의 낭인들이 모여 100명이 이상이 되었다. 모두 막부나 특정 번에 매인 몸이 아니었고, 교토의 치안 유지와 테러 방지가 그들의 임무였다.
모리오카 번의 하급무사의 차남으로 태어난 요시무라 칸이치로는 학문, 검술에 열중하여 모리오카 번 내에서 카고시마 신토류의 문을 두들기면서 두각을 나타낸다. 1863년에 에도에 가게 되어, 호쿠신잇토류의 현무관에 입문한다. 이즈음, 도장은 나라의 사정을 이야기 하는 장소이기도 하여서, 이때에 요시무라가 접한 이야기들이 그저 좀 실력 있는 시골무사였던 그를 신선조에 입대하게 하는 계기의 하나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 1865년, 요시무라는 탈번하여 천황파에 맞서 쇼군을 수호하겠다는 명목으로 결성된 신선조라는 무사 집단 입대한다. 문무 양쪽에 재능을 가지고 있어 제사취급역 겸 감찰, 격검사범으로 발탁된다. 1867년, 신선조가 막부의 신하로 등용되어, 요시무라는 미마와리구미(견회조, 막부순찰대) 수준의 격식을 받게 된다. 이 때, 고향의 가족에게 충분한 송금이 가능하여 감격해 울었다고 한다. 요시무라는 격검 사범직에 있었지만 정작 적을 벤 기록은 적다. 신선조의 둔영지가 이전할 때 니시혼간지에 교섭을 하러 가거나, 산죠 제찰사건의 사죄를 목적으로 한 도사 번의 향응에 요시무라가 참여하거나 하지만, 덴마야사건에서 미우라 야스시의 호위 역에 임해졌을 때에는, 특히 요시무라가 벤 기록은 없다. 짐작컨대 그는 무사보다는 논객으로서 활약을 한 듯하다. 1868년 정월, 도바 후시미 전투에 참가하지만 전사했는지 탈주했는지 하시모토 전투 이후의 소식은 두절되었다. 소설가 시모자와 칸에 의하면, 신선조가 오사카에서 떨어져 있다는 일을 안 요시무라는 길거리를 헤매어 모리오카 번 저택에 다시 번에 돌아올 것을 원했다. 하지만 대리인 역의 오노 지로에몬에게 무사에게 있을 수 없는 행위라고 비난을 받아 할복하라고 말하져 모리오카 번 저택 안에서 할복하여 생을 끝냈다고 한다. 할복한 방에는 2푼, 금 10장과, 쪽지가 놓여 있어, 쪽지에는 가족에게 송금을 원한다는 문장이 써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오노 지로자에몬이라는 인물은 가공의 인물이라는 것이 알려져, 요시무라의 최후는 시모자와 칸의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 자손인 카무라가의 과거장에는, 메이지 3년(1870년) 1월 15일 사망이라고 쓰여 있다.
영화는 요시무라 켄이치로와 막부 말 전란을 함께 싸운 동료였던 사이토 하지메가 요시모토의 제자이자 그의 딸인 미츠와 결혼한 치야키가 우연히 만나고, 요시무라의 사진을 보며 그에 대한 회상을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신선조의 사이토 하지메는 솜씨는 있어 보이지만 도무지 무사다운 기백이란 보이지도 않고 팔불출처럼 고향자랑에 가족자랑만 늘어놓는 요시무라에게 환멸을 느끼고 그를 죽여 버리고자 마음먹고 집으로 가는 길에 급습했으나 죽어 줄 수 없다며 대항해 오는 요시무라의 기백에 검을 거둔다.
요시무라는 위기를 모면했지만 이후로도 사이토의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이어나간다. 중요한 임무를 맡으면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전에 먼저 급료부터 물어본다. 요시무라가 신선조에 들어가 맡은 첫 번째 임무는 다른 대원과 함께 할복을 명령받은 니라타이쇼의 세야마 타키토의 케이샤쿠(介錯:할복할 때 고통을 줄여주려고 뒤에서 목을 베어주는 일)역이였는데 할복을 명 받은 대원이 죽지 않겠다고 난동을 부리자 요시무라가 쫓아가 그의 목을친다. 요시무라와 같이 케이샤쿠의 명을 받았던 대원은 할복을 피하기 위해 칼날을 들고 난동을 부리던 죄인에게 겁에 질려 임무를 다하지 못한-아니면 동료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수고비를 받지 않겠다고 하는데 요시무라는 칼이 상했다는 둥 핑계를 대며 더 많은 상금을 챙겼다. 뿐만 아니라 사양한 대원의 급료까지 자기가 챙겨버린다. 이러다보니 그는 수전노, 돈만 주면 뭐든지 하는 인간으로 낙인찍힌다. 요시무라가 수고비를 받고 신나서 뛰어나가는 장면에서 사이토 하지메는 그를 어이 없게 바라보고 콘도 이사미와 히지카타 토시조, 오키타 소지는 폭소를 터트린다. 폭소를 터트리며서 히지카타는 “저것도 사이무라이냐?”, 오키타는 “대단한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라고 비난한다. 명예체면을 중시하는 무사인 그들에게 돈을 위해 자신의 체면을 던져버리는 요시무라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고 천박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가난한 시골 무사에 불과했기 때문에 지독한 기근에 막내 딸을 종살이 보내야만 했던 아픔이 있었던 것이다. 셋째 아이를 몸종으로 들여보내고 자살을 기도한 아내 시츠를 부여안고 자신의 칼로 돈을 벌겠다고 결심했던 그의 처절한 속사정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고향의 아름다운 산천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었다.
자료평가
-
아직 평가한 내용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