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산 김창숙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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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종교사로서의 한국사
심산 김창숙에 대해.......
- 백 번 꺾어도 꺾이지 않은 민족의 자존을 읽고
1905이 저물어 가던 어느 날, 경복궁 앞에서 두 사람이 땅을 치며 통곡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60세쯤 되어 보이는 노년이었고 다른 한사람은 30세가 채 못 돼 보이는 청년이었다. 이들은 대한 제국이 이른바 보호라는 이름 아내 그해 11월17일 일본 제국과 불균등하게 체결한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나서 이렇다 할 반응이 없자 이렇게 대궐문 앞까지 찾아왔던 것이다. 두 사람은 바로 영남의 유학자 이승희(호는 大溪)와 그의 친구 아들 김창숙(心山)이었다. 이승희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체결된 조약을 즉각 파기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는 내용의 상소문을 지어 중앙으로 올려 보냈다. 그러나 끝내 고종황제의 비답을 받지 못하자 이 날 대궐문 앞으로 나아가 한스러운 통곡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27세의 청년 김창숙은 그의 스승을 따라 서울까지 올라와 지금까지 익혀온 유교적인 이념을 실천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결연한 투쟁의 첫발을 내디딘 것이었다.
김창숙은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사월리에서 1879년 음력 7월 10일 부친 김호림(호는 下岡)과 모친 안동 장씨의 1남 4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호를 직강(直岡), 심산(心山), 또는 벽옹(翁)이라 하였다. 직강은 부친이 방 앞으로 보이는 산 직준봉에 느낀 바 있어 선생을 경계하는 뜻으로 지어준 별호이고, 벽옹은 그가 독립운동을 하던 중 왜경에 잡혀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르다가 하제가 부자유스러워지자 남들이 벽옹(앉은뱅이 노인)이라 부르자 스스로 따라서 부르던 별호이다. 김창숙은 어려서부터 천부적인 총기를 타고나서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성품은 패기가 있어 결코 남에게 지기를 싫어하였으며 또한 사소한 일에 얽매이지 않았다. 김창숙은 총명한 패기를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소년 시절에는 차분히 학업에 전념하지 않았다. 또한 구속받기를 싫어하는 지질로 일관하였다.
부친 김호림은 진보적인 사상을 가졌던 선비로서 일찍이 문벌과 계급을 타파하고 노비를 해방해야 된다는 선진적 사고를 몸소 실천했던 사람이다. 이렇게 훌륭한 분이었지만 애석하게도 김창숙이 18세 되던 1896년 세상을 떠나니, 김창숙은 값진 가정교육을 받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김창숙의 어머니는 양육함에 있어서 무척 엄격하였다. 어머니의 훈계는 김창숙이 어리석음에 빠질 때마다 그로 하여금 잘못을 깨우치게 하고 눈물로서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치게 하였다.
19세기 말엽, 일본에게 침략당하고 있는 나라의 딱한 현실에 놓였을 때, 김창숙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현의 글을 읽고도 그들의 세상을 구제한 뜻을 깨우치게 못한다면 그야말로 가짜 선비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런 따위의 가짜 선비들을 제거해야만 비로소 치국평천하의 도를 노하는 데에 참여할 수가 있을 것이다."라고 역설하며 선비를 깨우는데 노력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김찬숙은 민족대표로 참여하지 못했다. 유림이 이 거사에 참여치 못함을 안타까워한 김창숙은 파리평화회의에 유림의 이름으로 글을 보내 독립을 천명하고자 했다. 총 137명의 명단을 들고 3월 23일 중국 봉천으로 떠났다.
거기서 다시 상해로 가 단재 신채호 들을 만났다.이때 상해에 있던 독립지사들은 이미 김규식을 파리에 파견한 상태였다. 유림이 만든 문건은 파리에 우편으로 보내기로 합의하고 김창숙은 상해에서 도산 안창호, 백범 김구, 백암 박은식 등과 임시정부 수립 논의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유림이 파리에 독립청원서를 보냈다는 사실이 발각나면서 조선에서는 일대 검거 열풍이 불었다. 김창숙과 더불어 이 일을 주도했던 곽종석은 74세의 노령에 체포되었으나 자신은 포로라고 주장하며 꿋꿋한 자세로 재판을 받았다. 징역 2년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곧 돌아가시고 말았다. 5백여 명의 유림이 체포되었던 이 사건을 파리장서 사건, 또는 제1차 유림단 사건이라고 부른다.
김창숙이 중국에 있는 동안 모친이 세상을 떠났다. 그가 돌아가려하자 김구 등은 그를 말렸다. 진실된 효도는 혁명을 완수하는 것이라는 말에 김창숙은 주저앉았다. 이후 김창숙은 상해와 북경을 오가며 석주 이상룡, 월남 이상재, 우당 이회영 등과 만났다. 이회영은 이미 만석 재산을 독립운동으로 모두 써버린 뒤라 형편이 곤궁하기 이를 데 없어, 김창숙이 공원에 나가자고 청을 넣어도 입고 나올 옷이 없어 거동하지 못할 정도였다. 놀란 김창숙이 사정을 알아보자 이미 이틀을 굶은 상태라 하였을 정도였다. 김창숙은 장기적인 투쟁을 위해 독립기지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만주의 동포들을 이주시켜 군사력으로 성장시킬 계획을 꾸몄다. 일단 땅은 빌리는데 성공했으나, 이주 자금이 없었기에 국내로 잠입하여 모금활동을 펼쳤다. 이때가 1925년이었다. 그러나 모금은 쉽지 않았다. 다들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얼마간 모인 자금을 가지고 그는 의열단을 지원하여 나석주 의사가 국내에 잠입하게 된다. 김창숙은 이동녕과 김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인심이 이미 죽었으니 만약 비상수단을 써서 진작시키지 않으면 우리들 해외에 있는 사람들도 또한 장차 돌아갈 곳이 없이 궁박하게 됨을 면하지 못할 것이오." 후일 김창숙의 이런 모금 활동이 알려지면서 다시 한 번 유림 검거 열풍이 분다. 이것을 제2차 유림단 사건이라 부른다. 이 시기에 가난이 이들의 목을 얼마나 죄었는지 그 절절함을 살펴볼수록 가슴이 먹먹해진다. 위장 귀순하여 자금을 모아오겠다는 사람들이 자꾸 생기고 김창숙은 그들에게 큰소리로 꾸짖는다.
"이미 변절한 것으로 알려진 뒤에 무슨 모금이 가능하냐고."
이 무렵 여운형이 밀정으로 몰려 곤란에 처하자 김창숙은 그의 신원을 보증해 준다. 하지만 그와는 결코 같이 일을 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김창숙의 시각에서 보면 여운형은 참으로 자발 맞은 인물이었던 것 같다. 1927년 김창숙은 고질병 치질이 심해져 수술을 받았다. 이때 장남 환기가 조선에서 체포되어 심한 고문 끝에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얼마 되지 않아 밀정들의 고발에 의해 일본 영사관 형사들에게 체포되기에 이른다. 나가사키를 거쳐 대구로 압송되어 고문을 받았다. 김창숙은 종이와 붓을 달라고 한 뒤 시 한 수를 써주었다.
조국의 광복을 도모한 지 10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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