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 산 김창숙의 생애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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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심산김창숙의 생애와 사상
종교사로서의 한국사
-심산의 생애를 가능하게 한 정신적 뿌리는 무엇인가?
들어가는 말
한국 근현대 사상과 민족운동사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한 가지는 조선왕조의 지배이념이었던 유교가 근대 이후에도 전통적 사상체계의 하나로서 여전히 한국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리면서 민족운동상의 사상과 운동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 속에 우리는 유학적 삶을 견지하였던 조선의 마지막 선비 김창숙의 생애와 사상에 관해 알아보고자 한다.
심산김창숙의 생애
김창숙은 1879년 7월 10(음) 경북 성주에서 출생하여 1962년 5월 10일 서울 중앙의료원에서 84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그는 일생을 통하여 민족의 독립과 통일,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고난에 찬 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유학자이다. 그의 생에는 대게 다음의 다섯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1879~1905년: ~27세) - 성장 및 1차 학습기. 이 시기는 김창숙이 성주에서 태어나 이승희의 문하에서 여러학자들에게 유학을 배우고 부친의 훈도를 들으면서, 당시의 유학자 및 현실에 대한 자기의식을 갖추어간 1차 학습기라고 할 수 있다.
제2기(1905~1919년: 27~41세) - 초기 활동 및 2차 학습기. 김창숙은 이 시기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있던 현실을 목도하고, 망국의 현실 앞에 절망하면서 고통 속에 자학의 세월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자학의 세월을 거치면서 새롭게 자기의 사상을 가다듬는 깊은 자기성숙의 과정을 거친다. 그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스승이었던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을사오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라는 상소를 올렸고, 그 뒤 일진회의 매국도당들이 한일합병론을 제창할 때에는 동지를 규합하여 중추원에 성토의 글을 보냈다. 한편 대한협회(大韓協會) 성주지부(星州支部)를 조직하여 계급타파를 부르짖고 기금을 모아 사립학교인 성명학교를 세워 이 지역에 신교육사상을 고취하였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인 이유(모친의 병)를 내세워 스승 이승희를 따라 중국으로 망명하지 않고 국내에 잔류 중, 결국 국권 피탈의 비운을 겪게 되었다. 그는 이후 3년여 동안 방황하다가, 모친의 깨우침에 힘입어 두문불출하고 4~5년 동안 집안의 장서, 그중에서도 경서와 제자백가서를 탐독하면서 깊은 자기 성찰의 기회를 맞이하였다. 심산의 학문적 축적과 한문 문장의 창달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제3기(1919~1927년: 41~49세) - 독립운동기. 이 시기는 김창숙이 1919년의 3.1운동을 계기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펼쳐나가는 기간이다. 김창숙은 3.1운동이 발발하자 전국 유림을 규합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130여명의 연명으로 된 장서의 내용을 각국에 알리는 역할을 담당하였다(제1차 유림단 사건). 이후 중국에 머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초기 임정활동에 참여하였고 아울러 유학과 한문학의 교양을 바탕으로 중국 국민당 인사들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한국독립후원회(광동)와 중한호조회(中澣互助會)(상해)를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1925~26년에는 내몽고 중부지방에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자금 모집을 목적으로 국내에 직접 잠입하여 활동하였다(제 2차 유림단 사건). 출국 후에는 의열투쟁에 의한 독립운동노선에 공감하여 1926년 일제 식민지기관인 동척과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지고 일본일을 사살한 ’나석주 의거‘를 주도하였다. 이 시기는 김창숙이초기의 대 중국 외교활동에서 의열투쟁으로 독립운동의 방략전환을 모색하던 과정으로 파악할 수 있다.
제4기(1927~1945년: 49~67세) - 옥중투쟁 및 활동모색기. 김창숙은 ‘제2차 유림단 사건’혐의로 1927년 상해 공공조계(公共租界)의 영국인 병원에서 일본 형사에게 체포되어 본국으로 압송되었다. 1년여의 갖은 고문을 치르고 14년형을 언도받았으나, 그 사이 그는 일본의 법률자체를 부정하는 불굴의 옥중투쟁을 전개하였고, 일제의 가혹한 고문 때문에 두 다리가 마비되었으며, 사경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건강악화로 인한 형 집행정지로 출옥한 그는 요양 후 성주 옛집으로 돌아왔다. 이 기간에도 심산은 일제의 창씨개명을 준열히 거부하고, 1943년 겨울에는 아들을 중경임시정부에 파견하는 한편, 국내에서의 활동재개를 모색하며 치열한 독립정신으로 일관하였다.
제5기(1945~1962년: 67~84세) - 해방 후 정치 및 교육활동기. 이 시기는 김창숙이 해방을 맞이하여 고령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자주통일과 민주주의 및 민족교육을 위해 활동한 기간이다. 김창숙은 1945년 8월 7일 일제의 예비검속으로 구속되었다가, 왜관경찰서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직후에는 무명회(無名會)에 가입하기도 하였고 미군정의 자문기관인 민주의원(民主議院)의 의원을 역임하기도 하였지만, 미군정 기간 동안 일관되게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김구의 활동을 보조하면서 임시정부 봉대운동에 진력하였다. 그는 또 분단정부의 수립을 위한 5.10총선거에 불참하고 남북정치협상운동에 참가하는 등 통일민족국가수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남북협상운동이 실패하고 김구가 암살된 이후에는 민족진영강화위원회를 통하여 중도파, 한독당 세력과 일시 연합하기도 하였다. 그는 50년대를 일관하여 반이승만 활동을 전개하면서 야당세력을 후원하는 입장에 있었다. 1951년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하야 경고문’을 시작으로 1960년의 ‘이대통령 사퇴 권고’에 이르기까지 그의 반독재 투쟁은 그칠 줄을 몰랐다. 한편 같은 시기 그는 유림(儒林)을 재조직하고 이를 발판으로 성균관, 성균관대학을 설립하여 유교이념에 입각한 근대적 시민교육의 실시에 힘을 기울임으로써, 그의 일관된 구국교육사상을 실천하는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그는 1957년 성균관, 성균관대학 운영에서 물러난 이후, 집 한 칸도 없이 궁핍한 생활 속에서 여관과 병원을 전전하던 끝에, 1962년 온 국민의 애도 속에 숨을 거두었다.
심산김창숙의 사상
김창숙의 민족의식과 사상의 형성 과정은 대체로 세 갈래에서 연유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첫째, 성주지방에서 독특한 학풍으로 전수되고 있던 한주 이진상에서 비롯하는 한주학파의 사상, 둘째, 그의 13대조인 동강 김우옹으로부터 이어지는 가학적인 전통과 부친의 영향, 셋째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자신이 독학으로 정립한 유학사상이다.
성주 지방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한주학파의 사상은 김창숙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즉 김창숙은 같은 성주비장의 한주학파, 그 중에서도 곽종석과 이승희와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유교적인 입장을 명확히 견지하면서도 그 속에서 서양 문물과 만국공법을 수용하고, 외교적인 방략을 통해 구권을 회복시킬 수 있다는 사상과 방도를 갖춰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주학파와의 만남이 그의 사상 체계 형성에 형향을 준 전부는 아니었으며, 김창숙 자신이 한주학파의 사상을 모두 그대로 수용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먼저 한주학파의 사상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 ‘심즉리’이론을 성리학의 난해한 체계 속에서 밀도 있게 수용하지는 않았다. 또한 한주하파가 제시하고 있는 토지 문제와 조세 제도 등에 대한 제반의 강구책에도 깊은 관심을 드러내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김창숙의 스승들이 재지사족의 입장에서 신분제의 제약이라는 고식적인 틀 안에서 단지 유교 경전의 재해석을 통해 당시 사회의 모순점을 해결하려 하였음에 반해, 그는 부친의 영향 하에서 오히려 신분제의 타파를 통한 현실적인 해결책을 강구해 갔다. 김창숙의 부친 김호림은 갑오농민전쟁에 대해 지지를 보내는 등 농민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러한 면모는 당시 사족으로서는 매우 드문 사례였다. 또한 그는 신분과 게금 타파에 대한 진보적인 잇ㄴ식도 가지고 있었고, 당시 실학자와 교류하면서 허식이 아닌 실질을 숭상하는 기풍을 지니고 있었다. 김창숙이 대한협회 성주지부를 설치하고, 사림 성명학교를 세우는 데에는 이 같은 부친의 형향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심산 김창숙 평전 - 김삼웅 | 시대의창 | 2006.03.24
심산 김창숙 연구 - 권기훈 | 도서출판선인| 2007.09.20
김창숙 문존 - 심산사상연구회|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01.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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