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작성 사마리아 여인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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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사마리아 여인의 최후
-설교작성-
제 이름은 포티나(Photina)입니다. 저에 대해서 아시는 분 있으신가요? 제 이름이 성경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잘 모르실 겁니다. 저는 참으로 기구한 삶을 산 여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저는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삶을 살다가 지옥으로 갔을 겁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저는 모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네명의 남자와 살았고, 그 때는 다섯번째 남자와 살고 있었기때문입니다. 아. 이제 제가 누군지 아시겠죠? 바로 수가성에 살던 사마리아 여자입니다. 동네사람들은 나만 보면 하도 손가락질하고 수근거려서 동네를 마음놓고 걸어다닐 수도 없었습니다. 동네사람 만나는 것이 몹시 싫었습니다. 나를 창녀취급 하더라구요. 전 창녀가 아닙니다. 돈을 받고 몸을 팔지 않습니다. 다만 내맘에 꼭드는 남자가 없었을 뿐이죠. 하도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해서 저는 사람들을 피하게 되었고, 언제부터인가 그런 제 삶에 대해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저도 그렇게 여러 남자를 바꿔가며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화끈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이 남자다 싶으면 모든 것을 다 줍니다.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줍니다. 제 마음을 다 줍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 남자가 나만을 사랑해주고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주지 않는 것을 보면 참을 수가 없습니다. 나를 사랑해주는 남자만 있으면 내 삶이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쉽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내 삶을 행복하게 해줄 나의 남자를 찾아 헤맸습니다. 그게 뭐 잘못인가요?
수가에는 동네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우물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야곱의 우물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조상 야곱께서 우리에게 준 것입니다. 보통 동네 여자들은 해가 지면 물을 길러 우물로 모입니다. 만나서 물도 긷고 이런 저런 이야기도 나눕니다. 저는 그들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들의 수군거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뜨겁지만 한 낮에 물길러 다녔습니다. 한 낮에 물길러 가면 아무도 없습니다. 우물옆에는 여행자들이 지나가다 쉴을 수 있도록 앉을 자리가 만들어져 있는데, 가끔 그곳에 여행자들이 앉아서 쉬곤했습니다. 어차피 그들은 나를 모르기때문에 뭐 그리 신경쓰이지는 않았습니다. 우물 곁에는 우리가 함께 쓰는 두레박이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물을 푸는데, 우물이 워낙 깊어서 한 참 동안 줄을 내려야 합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깊이가 한 50미터정도 됩니다. 여자가 100미터를 뛰면 느린 사람은 20초정도 걸리니까 제가 뛰어서 10초는 가야하는 거리죠. 워낙 깊은 데다 아래쪽은 장정 한 사람이 똑바로 누워도 한참 남을 만큼 공간이 큽니다. 때문에 물은 정말 시원합니다. 그날도 한 남자가 여느 여행자처럼 그곳에 앉아 있었습니다. 딱 봐도 유대인이었습니다. 굉장히 지처 보였습니다. 저는 못 본 척하고 물을 길었습니다. 그런데 내게 말을 거는 것이었습니다. “물을 좀 달라.” 말하는 것을 들으니 분명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이 왜 나한테 물 달라고 부탁을 하지? 저 사람들은 우리를 짐승처럼 생각하고 상종하지도 안잖아! 거기다 난 여잔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우리 사마리아인들을 사람취급하지 않았습니다. 뭐 우리 잘못도 아닌데, 그들은 우리가 이스라엘민족이 아니라고 합니다. 비록 우리가 예전에 다른 민족과 섞이기는 했지만 우리도 엄연히 야곱의 후손입니다. 우리도 모세가 쓴 성경을 모두 믿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우리를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해서 예루살렘성전에 들어 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우리도 사실 유대인이 싫습니다. 상황이 그런데, 유대인 남자가 내게 물을 달라고 했으니, 저도 좀 떨떠름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가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좀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맞지 않습니까? 언제는 사람취급도 안하고 더럽다고 피해다니다가 갑자가 물달라고 그러니까요. 그런데 그 유대인 남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대답? 나 한테 물달라고 할 땐 언제고 이제는 구하면 생수를 주겠다고 하다니.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물’을 운운하는 것을 보니 상당히 종교적인 냄새가 났습니다. 말하는 것이 권위가 있는 것이 랍비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그분이 어떤 분인지 조금은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무슨 말씀을 하는지는 도통 알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거기다 그분이 내게 생수를 어떻게 주신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야곱의 우물말고 다른 우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설령있다손 치더라도 그분에게는 물 길을 그릇도 없었습니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크니이까?” 물었습니다. 말도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어떤 인간도 우리 조상 야곱보다 클 수는 없으니까요. 야곱만이 우리에게 이런 어마어마한 우물을 줄 수 있고 시원한 생수를 줄 수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분은 또 한번 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했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와우. 우물에서 퍼서 먹는 것은 분명 먹고나면 다시 목마릅니다. 그래서 물이 떨어지면 다시 물길러 와야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 물이 있는지는 그 때 처음 들었습니다.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라고 얼른 대답했습니다. 그런 물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을 다시 마시지 않아도 되죠. 다시는 혹시 동네 사람이 있을까 살피면서 몰래몰래 야곱의 우물로 물길러 오지 않아도 되죠. 우물곁에 혹 동네사람이 있으면 전 멀리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당장이라도 받고 싶었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그분의 이 한마디로 제 머리가 멍해졌습니다. 제 귀에는 저의 심장소리만 크게 들렸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마법의 생수를 금방이라도 주실 것만 같더니 왜 갑자기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시는 거지? 왜 내가 가장 숨기고 싶은 이야기를 꺼내시는 걸까? 남편은 왜? 없는데. 지금 살고 있는 남자는 남편이 아닌데. 그냥 같이 살 뿐인데.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들릴 듯 말 듯 대답했습니다. 뭐 큰 소리로 대답할 일도 아니었구요. 그런데 그 분은 더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그 분은 내가 여러번 결혼한 것도 아셨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와는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고 있는 것까지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거기다 그 분은 나의 과거의 삶을 손가락질하시거나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의 대답을 옳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내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나의 얼어붙은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말씀하시는 그 분이 보통 분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 아니라면 결코 그런 말씀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전 그 분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일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라고 나도 모르게 소리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 앞에 서있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니, 나 자신이 한 없이 부끄럽게 여겨졌습니다. 여러번 결혼을 하고 지금은 결혼도 안 하고 다른 남자와 동거하는 내 삶이 더럽게 보였습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는 항상 양심의 가책과 하나님께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인데 이런 나를 모두 알면서도 책망하시지 않고 오히려 나의 말일 옳다고 위로해주셨습니다.
저는 그분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했고 예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떻게 어디서 예배해야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분께 물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정말로 우리 조상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만 예배해야한다고 하고는 우리가 그곳에서 예배할 수 없도록 막았습니다. 우리가 더럽다는 거죠. 나의 말을 들으시고 그분은 예배에 대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 나는 그분이 예루살렘 아니면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맞다고 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둘 다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도저히 말이 안되었습니다. 다른 데는 성전이 없는데 어떻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 그리고 하나님께 참으로 예배할 때가 온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지금까지는 참으로 예배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인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니 모두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맞는 말씀일 거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분께 말씀드렸습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우리 사마리아 사람들은 언젠가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가 와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신18:15). 저도 만찮가지로 메시야가 오실 것에 대해 들었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입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 나왔습니다. “네가 말하는 내가 그로라.” 이 대답을 듣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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