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의식의 성장 파한집 이규보의 문학론 보한집 최해의 시도 역옹패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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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문학이 성장하면서 문학을 하는 자세와 방법에 대한 검토를 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추세이다. 본격적인 비평은 고려 후기에 나타났으며, 이인로(李仁老, 1152~1220)의 <파한집>(破閑集)을 그 첫 예로 들 수 있다.
<파한집>은 시화를 모은 책이다. 시를 짓는데 따르는 일화에다 시평을 곁들이고, 이따금 작가론이나 문학 일반론까지 보태서 전에 볼 수 없었던 책을 마련했다. 이 책에는 서문이 없고 대뜸 일화를 하나 들었다. 이름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정여령이라는 사람의 일화를 들어 문학의 재능이란 겉보기로 평가할 수 없다는 이인로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다.
이름을 세황이라고 한 아들이 이인로가 세상을 떠난 지 40년 만에 책을 간행하면서 아버지를 대신해서 발문을 붙이고, 듣고 보아 알았다는 일을 적어놓았다. 이인로는 오세재임춘의 무리와 함께 죽림고회를 열 때 서로 이르기를 빼어난 문인들의 작품을 모아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한다. 이에 우리나라의 자부심을 전할 <파한집>같은 책이 있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중국에서까지 재주를 자랑한 문인의 예로는 최치원과 박인량을 들고 그 뒤의 문인들을 여럿 등장시켰다. 당시의 시인과 시를 어느 정도 다룬 셈이니 수록한 자료가 대단하고, 거기다가 오세재임춘 그리고 이인로 자신의 경우를 보태서 자화자찬을 하는 것으로 드러나지 않은 결론을 삼았다.
책이름을 <파한집>이라고 붙인 의도가 이세황의 발문에 나타나 있다. 한가로움을 깨뜨린다고 하는 정도의 단순한 뜻이 아니라 명리나 지위 같은 것들 바라지 않고 한가함을 온전하게 해야 그것을 깨뜨릴 수 있다고 했다. 그런 주장에 근거해 오세재나 임춘은 말할 것도 없고 이인로 자신도 문학의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자부하면서 인정받아 크게 진출하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 이세황의 발문에서도 이인로가 인정받지 못한 아쉬움이 드러나 있다.
이인로가 <파한집>을 쓴 근본적인 이유는 문학이 위기에 몰렸던 데 있다. 무신란으로 문학이 나라에서 쓰이지 않자 그는 문학의 의의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문학은 그 자체로서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다고 말하며 문학의 가치는 사회적 처지에 영향을 받지 않으며 그런 것을 넘어선다고 하고자 했다.
또, 고전에서 표현의 공교로움을 전수하고자 해서 거의 극단적이라고 할 수 있는 복고주의와 형식주의를 택했다. 문학관을 모처럼 철저하게 재검토 했으나 새 시대의 경험을 폭넓게 받아들이는 데는 관심을 가지지 않은 한계가 있다.
이인로가 고인을 본뜨는 것이 훌륭하다는 주장을 앞세운 것은 아니다. 그는 고인의 표현을 가져와서 새로운 효과가 나게 활용하고자 한 것이다. 물(物)을 새롭게 탐구할 필요는 없고 마음에 이미 갖추어져 있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물을 매개로 삼는 탁물우의(托物寓意)의 수법을 연마하는 것이 가장 긴요한 일이라고 여겼다.
2. 이규보의 문학론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시화집인 <백운소설>을 지었다고 한다. 홍만종의 <시화총림>에 그 책이 수록되어 있는데 잡록은 없고 시화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규보가 그런 책을 지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규보는 자기 주장을 적극적으로 편 사람이었다. 문학이 무엇이며 어떤 구실을 해야 하는가를 스스로 고민하고 깨달은 바를 설득력 있게 풀어 밝히고, 극복해야 할 부분은 서슴지 않고 비판하였다. 이는 시화의 범위를 넘어선 비평의 다양한 방식을 개척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필요가 있다.
이규보는 문학 창작이란 자기대로 삶의 결단을 나타내는 독창적인 작업이어야 한다고 했다. 문학은 자기의 기(기질이나 개성)를 통해서 하늘과 만나야 하지, 말 다듬는 재간을 통해서 옛적의 명문과 만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복고주의와 형식주의를 아울러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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