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후기 문학비평 의식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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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본격적인 비평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비로소 나타났으며, 이인로(李仁老, 1152~1220)의 <破閑集>을 그 첫 예로 들 수 있다.
<파한집>은 시화를 모은 책이다. 시를 짓는 데 따르는 일화에다 시평을 곁들이고, 이따금 작가론이나 문학 일반론까지 보태서 전에 볼 수 없었던 책을 마련했다. 잡록이라고 할 수 있는 대목도 적지 않게 들어 있지만, 그런 이유에서 시화의 의의가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일정한 체계를 갖추지 않고서 생각나는 대로 써모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새로운 문학관을 나타내는 데는 오히려 유리할 수 있었다. 산만하기만 한 것 같은 내용을 정리하고 음미해보면 거기에 문학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관한 어느 정도 일관된 주장이 나타나 있다.
이 책에는 서문이 없다. 본문 앞머리에도 일반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내세우지 않고 대뜸 일화를 하나 들었다. 이름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정여령(鄭與齡)이라는 사람이 자기 고향의 경치를 그린 그림을 보고 즉석에서 아주 짜임새 있는 시를 지어 당대 명사들을 탄복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런 서두에 어떤 숨은 의미가 있다고 인정된다면, 문학의 재능이란 겉보기로 평가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그 다음에는 명성 높은 송나라 승려 혜홍(惠洪)의 작품에 기대를 걸었다가 실망을 했다고 했다. 그러고는 얼마 동안은 자기가 시를 지은 사연을 늘어놓았다. 계속 이런 방식으로 시에 관한 일화를 들고, 작품을 소개하고, 평을 했다.
중국에서까지 재주를 자랑한 문인의 예로는 최치원(崔致遠)과 박인량(朴寅亮)을 들고, 그런 인재가 남긴 작품이 묻혀버린대서야 말이 아니라고 했다. 죽림고회에서 서로 나눈 이야기에 따라서, 책을 지을 때에는 그 뒤의 문인들을 여럿 등장시켰다. 예종 때가 좋은 시절이었음을 거듭 말하고, 곽여(郭輿)가 예종과 벗이 되어 시를 주고받았다고 감탄하고, 이자현(李資玄)의 행적과 작품에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정지상(鄭知常)은 이름은 잊었다고 하면서 작품을 거론했다. 당시까지의 시인과 시를 어느 정도 다룬 셈이니 수록한 자료가 대단하다 하겠는데, 거기다가 오세재임춘 그리고 이인로 자신의 경우를 보태서 자화자찬을 하는 것으로 드러나지 않은 결론을 삼았다.
책이름을 <파한집>이라고 붙인 의도도 이세황의 발문에 나타나 있다. 한가로움을 깨뜨린다고 하는 정도의 단순한 뜻은 아니다. 벼슬을 한 적이 있거나 산림에 자취를 감추었거나, 마음이 바깥의 일을 사모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한가하다고 할 수 있으며, 한가함을 온전하게 해야 그것을 깨뜨릴 수도 있다고 했다. 바깥의 일이란 명리나 지위 같은 것들이며, 마음을 가다듬는 데 방해가 된다고 보았다. 마음을 가다듬어야 순수한 문학을 할 수 있고, 그런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야 한가함을 깨뜨리고 진출할 만하다는 주장이 그렇게 말한데 숨어 있다.
그런 주장에 근거를 두고 오세재나 임춘은 말할 것도 없고 이인로 자신도 문학의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자부하면서, 인정받아 크게 진출하지 못한 것을 한탄했으니, 어찌 보면 논리가 닿고, 뒤집어서 생각하면 자기 입장을 합리화하는 데 허점이 있다 하겠다. 그 발문에서 이세황은 이인로가 <파한집>을 지어놓고서도 임금에게 아뢰지 못해 간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고, 과거를 관장해볼 기회를 갖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도 아울러 애통하게 여겼다. 몽고란을 만나서 소중한 원고를 간직하느라고 참으로 힘이 들었다는 말도 하면서, 이인로가 바라던 만큼 인정받지 못한 아쉬움을 대를 물려 되씹었다.
좀더 깊이 생각해본다면, 이인로가 <파한집>을 쓴 근본적인 이유는 문학이 위기에 몰렸던 데 있다. 무신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문학이 과거를 거쳐 영달을 하는데 필요하고, 나라의 일을 맡아 능력을 발휘하고 밖으로 외교를 하는데 더없이 소중하다고 하면 그만이었을 수 있다. 그런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문학에 대한 근본적은 재검토가 요청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무신란이 일어나자 그동안의 조화가 결정적으로 파괴되었다. 이인로는 나라에서 쓰이지 않는 문학이 무슨 의의를 가지는가 심각하게 생각하였다.
문벌귀족의 후예라는 자랑과 문인으로서의 자부심 가운데서 앞의 것이 통용되기 어려울수록 뒤의 것을 절대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문학이 그 자체로서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다는 주장은 예술지상주의에 가깝다고 하겠는데, 절대적인 가치가 창작을 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간직하는 신념이라고 하지 않고 누구나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인 실체라고 한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자면 어떤 것이 완성된 문자이고, 글을 어떻게 써야 해와 달, 구름과 안개처럼 아름다울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며, 평가의 기준을 제사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와 어울리는 사람들이 불우한 처지를 하소연하는 글을 써서, 그런 글이 내용의 진실성 때문에 감동을 주기에 아름답다고 하지 않았다. 처지는 불우해도 작품은 언제나 변함없는 기준에 합당하고 높은 수준을 견지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래서 문학의 가치는 사회적 처지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그런 것을 넘어선다고 하고자 했다.
그렇게 말하는 데 바로 옛사람을 본받아야 한다는 방향으로 문학론이 기울어지지 않을 수 없는 구체적인 이유가 있다. 아름다운 표현은 널리 규범이 되는 고전적인 명문에서 이미 구현되었으니, 그것을 충실하게 배우고 따라야 마땅하고 다른 방도는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무엇을 나타냈는가는 관심 밖에다 두고 표현의 공교로움을 전수하고자 해서 거의 극단적이라고 할 수 있는 복고주의와 형식주의를 택했다. 문학관을 모처럼 철저하게 재검토했으면서도 새 시대의 경험을 폭 넓게 받아들이는 데는 관심을 갖지 않고, 고려 전기 귀족문학이 못 다 이룰 수밖에 없었던 소망을 남김없이 실현하자는 방향을 설정했다.
시화는 창작의 실제 경험을 들어서 시작법을 일러주는 소임까지 맡아야 했다. 이인로가 하고자 하는 충고가 여기 요약되고 있다. 생각일 떠오른다고 해서 함부로 시를 써내는 태도를 무엇보다도 배격했다. 오랫동안 수련을 쌓으며 애써서 갈고 닦아야 한다면서 글자 한 자 한자를 안배하기에 밤낮으로 힘을 다한 사람, 한 해 동안 시 세 편만을 써서 줄곧 고치기만 한 사람의 경우까지 들었다.
용사(用事)를 정묘(精妙)하게 해 고인의 표현을 가져와서 새로운 효과가 나게 활용하자고 했다. 문을 닫고 들어앉아 송나라 시인 황정견(黃庭堅)이나 소식(蘇軾)의 문집을 숙독해 시 짓는 방법을 터득했다고 한 창작수련이 그렇게 생각한 데 근거를 두었다. 물(物)을 새롭게 탐구할 필요는 없고, 마음에 이미 갖추어져 있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물을 매개로 삼는 탁물우의(托物寓意)의 수법을 연마하는 것이 가장 긴요한 일이라고 여겼다.
이인로는 설사 경험이 누적되었더라도 아직 표현되지 않은 마음은 형상을 얻어볼 수 없다고 해서, 말로 나타내고 시로 구현하는 표현이야말로 아득하기만 한 것을 분명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는 논리를 마련했다. 그러면서 형식주의의 가치를 다시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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