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국내 이공계 탐방을 다녀온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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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이공계 탐방을 다녀온 후
첫째 날에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입자가속기 연구소로 유명한 포항공대였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입학 전형부터 들어야 했는데 처음에는 ‘우리 대학은 국제적 수준의 고급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하기에 이 목표에 걸맞은 잠재적인 재능을 보이는 학생들을 원한다.’, ‘가장 중요하게 평가하는 것은 잠재력과 성장 가능성이다.’, ‘1차 전형은 서류전형으로 입학생의 몇 배수를 뽑으며 그 후 2차 전형인 수학 및 과학 심층면접을 통해 최종으로 합격생을 선발한다.’ 등과 같이 모든 대학교가 비슷하고 뻔한 설명을 해서 솔직히 지루했다. 새로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과학고에서 상위 30%, 즉 24등 이내에 들면 지원할만하다는 것과 1학년 때에는 전공별로 나뉘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반별로 공부하며 2학년 초까지는 전공을 바꾸기 비교적 쉽다는 것이었다. 이후 점심을 먹은 뒤 각 학생들이 탐방을 오기 전에 생각해두었던 실험실을 방문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생명과학 LAB을 방문했는데 이곳을 방문하면서 과연 앨빈 토플러가 예측했듯이 제 3의 물결 다음 제 4의 물결은 생명과학이 주도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 생각을 하게 된 건 시스템 단백질 생화학 분야의 실험실에서였다. 연구자 분의 말씀에 따르면 이 학문은 폭넓게 말하자면 단백질의 암세포에서의 작동과 같이 단백질의 특성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한다. 내가 이 분야에서 놀란 점은 현재 수명을 조절하는 단백질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전에 텔로미어라는 염색체의 일부가 수명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들어본 적이 있고 그것을 연구하는 연구소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해봤지만 실제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는 곳을 직접 가보니 놀라웠다. 이 밖에도 식물 바이오텍 분야 관련 실험실도 방문하고 온실을 둘러본 뒤 월성 원자력 본부로 이동했다.
월성 원자력 본부에서는 지진으로 인해 일본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폭발이 한창 이슈가 되고 있는 터라 그런지 우리나라는 일본과 발전소의 형식이 궤를 달리하기 때문에 절대로 일본과 같은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워낙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건을 많이 접했던 터에 그랬는지 이곳에서 설명을 듣기 전까지는 원자력이라는 말을 들으면 살짝 거부감이 들었지만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시설을 점검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안전사고에 대해 대비하는지에 대해 설명을 들으면서 그러한 생각을 고칠 수 있었다. 또한 우리가 자연 방사선을 연간 2.4밀리 시버트 정도를 쬐고 있는데 그에 반해 원자력 주변에서는 단지 추가로 연간 0.05밀리 시버트 정도의 방사선만을 더 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우리가 너무 원자력에 대해 소문만을 듣고 괜한 불안감을 가진 것은 아닌가 싶었다. 이후 숙소로 이동하였고 둘째 날 아침이 밝았다.
둘째 날에는 가장 먼저 카이스트에 갔다. 카이스트에서도 포항공대에서 들었듯이 입학 전형을 들어야 했다. 입학 전형을 설명하시는 분이 간간이 인공위성 개발이나 휴머노이드 로봇 개발을 카이스트에서 해냈다는 말씀을 반복하시던 모습을 보며 역시 카이스트답게 자부심도 크고 그를 뒷받침하는 실력도 매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언젠가 이런 대학에 발을 디딜 것이라고 다짐하게 되었다. 입학 전형 이후에는 버스를 타고 카이스트 홍보동아리 카이누리 분들의 설명을 들으며 캠퍼스를 구경했다.
마지막으로 서울대학교에 갔는데 솔직히 여기서는 아무런 지식적인 소득은 없었다. 도착하자마자 서울대학교의 홍보 동아리 ‘샤인’ 분들의 설명을 들었는데 입학 전형처럼 대입에 필요한 부분이 아니라 서울대학교에서 학생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노는지에 대한 이야기만 잔뜩 들어야 했다. 그 후에는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가서 여러 문서들을 볼 수 있었는데 이들을 보면서 지금 내가 국내 이공계 탐방을 온 것이 맞는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서울대학교까지 다 둘러보고 난 후 버스를 타고 다시 울산에 내려왔다. 이번 국내 이공계 탐방을 다녀오면서 가장 도움이 되었던 부분은 전공의 결정에 관해서였다. 사실 울산과학고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내가 화학을 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즐길 수 있기 때문에 화학 전공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입학하고 나서 전공이라는 것이 즐기기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화학을 잘 하는 다른 친구들에게 위축되기도 했다. 그러면서 내가 무엇을 전공하고 싶어 하는지조차 의문이 들기 시작했으며 누군가가 내게 장래 희망이 뭐냐고 물어본다면 어물쩍거리며 넘어갈 만큼 미래에 대한 나의 생각이 애매모호해졌다. 그러던 중 이렇게 국내 이공계 탐방을 다녀오게 되었고 카이스트와 포항공대에서 입학 전형을 들으면서 존공에 대해 내가 느끼고 있던 압박감이 해소되었다. 이 두 대학에서는 2학년 초까지 전공을 바꾸는 것을 쉽게 허가해준다는 것이다. 입학 전형관의 말씀에 따르면 이렇게 전공을 쉽게 바꾸도록 하는 조치가 학부생 중 자신의 전공이 아닌 다른 전공에 흥미가 생긴 학생들을 위한 것이라 하니 전공에 대해 불확실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나로서는 더 이상 전공에 대해 걱정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된 것이다. 이밖에도 국내 이공계 대학들의 단편적인 모습이나마 살펴봄으로써 조금 더 열심히 해서 꼭 이런 대학에 합격하겠다는 목표 의식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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