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요(薯童謠) 작품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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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요(薯童謠)> 작품론
1. 작품요약
1) 작품전문
善化公主主隱 선화공주님은
他密只嫁良置古 남 그윽히 얼어두고
薯童房乙 서동 방을
夜矣卯乙抱遣去如 밤에 몰래 안고 가다 임기중, 『우리의 옛노래』, 현암사, 1993, p.23.
2) 배경설화
제 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그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 속의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던 것이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으로 재주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 항상 마를 캐다가 파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서동이라도 이름을 지었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공주 선화가 뛰어나게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머리를 깎고 서울로 가서 마을 아이들에게 마를 먹이니 이내 아이들이 친해져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이에 동요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니 그것은 이러하다…(중략)…동요가 서울에 가득 퍼져서 대궐 안에까지 들리니 백관들이 임금에게 심히 간해서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을 보내게 하여 장차 떠나려 하는데 왕후는 순금 한말을 주어 노자로 쓰게 했다. 공주가 장차 귀양처에 도착하려는데 도중에 서동이 나와 공주에게 절하면서 모시고 가겠다고 하였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저 우연히 믿고 좋아하매 서동은 그를 따라가서 몰래 정을 통했다. 그런 뒤에 서동의 이름을 알고 동요가 맞는 것도 알았다. 함께 백제로 와서 모후가 준 금을 꺼내놓고 살아갈 계획을 세우려 하자 서동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게 무엇이요 공주가 말했다. 이것은 황금인데 백년의 부를 누릴 것입니다. 내가 어릴 때부터 마를 캐던 곳에 황금을 흙더미처럼 쌓아두었소. 공주는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면서 말했다. 그것은 천하의 가장 큰 보배니 그대는 지금 그 금이 있는 곳을 알면은 그것을 우리 부모님이 계신 대궐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좋소이다. 이에 금을 모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용화산 사자가의 지명법사에게 가서 이것을 실어 보낼 방법을 물으니 법사가 말하기를 내가 신통한 힘으로 보낼 것이니 금을 이리로 가져오시오. 이리하여 공주가 부모에게 보내는 편지와 함께 금을 사자사 앞에 갖다놓았다.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하룻밤 동안에 그 금을 신라 궁중으로 보냈다. 진평왕은 그 신비스러운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서동을 존경했으며, 항상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이 이로부터 안심을 얻어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 어느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 큰 연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다. 부인이 왕에게 말한다. 모름지기 여기에 큰 절을 지어 주십시오 그것이 제소원입니다. 왕이 그것을 허락했다. 곧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으니 신비스러운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헐어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여기에 미륵삼회전과 탑과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 했다. 진평왕이 여러 공인들을 보내서 그 역사를 돕게 하니 그 절은 지금도 남아있다. 임기중, 앞의 책.
2. 주제
연정(戀情), 선화공주의 비행 풍자, 아내를 얻기 위한 계략.
3. 기존 연구
서동요의 연구 중에서 가장 활발히 진행되었던 것은 작자의 문제이다. 동성왕 무령왕 원효 무왕 등의 논의가 있다. 여기서는 그러한 견해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양주동은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은 『삼국유사』에 ‘小名薯童…常掘署 賣爲活業’ 이라 하였으나 이는 무왕의 幼名(유명)이 末子(말자)의 義의 ‘둥’임에서 생긴 전설이니 둥(막둥, 마퉁)이 末子의 原義임은 왕의 俗名 ‘末通大王’으로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麗史』(57 지리 2)에서 ‘俗稱末通大王 一云 百濟武王 小名薯童’이라 한 것과 『세종실록』에서 ‘在郡西北五里許 俗武康王爲末通大王’이라 한 것을 전거로 삼아 서동이 백제 무왕이라는 것, 서동은 末子의 뜻인 ‘막둥이’로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이라는 것을 논증한 바 있다. 김정주, 『신라향가연구』, 조선대학교 출판부, 2003. p.86.
그러나 이병도는 서동설화에 대한 신고찰 이병도, 「서동설화에 대한 신고찰」, 『역사학보』 제 1집,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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