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어학 30년 종교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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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종교전쟁
16세기와 17세기의 유럽은 종교개혁으로 인한 종교분열과 종교전쟁의 시기였다. 르네상스와 휴머니즘에 의해 정신적인 변화가 이루어짐으로써 새롭게 깨어난 비판의식은 교회의 폐해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세속화된 교회에 대한 불만은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폭발되었다. 종교개혁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합스부르크가의 황제인 카알 5세 였는데 그의 목표는 제국의 통일과 교회의 통일을 유지하는 것이었으므로 루터 및 루터를 지지하는 독일의 제후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평화조약으로 지방제후들은 종교를 그들의 예속 아래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으며, 개신교는 구교와 동등한 가치를 인정받음으로써 독일은 종교적으로 양분되었다. 지배자의 신앙이 지배지의 신앙이다라는 원칙에 의해 각 지역의 주민들은 그들 군주의 종교에 따라 구교와 신교 둘 중 하나를 믿게 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의 북부 및 중부독일은 대부분이 신교 지역이고 남부는 주로 구교이다. 그러나 이 조약으로 정치적 종교적 분쟁이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카톨릭 측에서 반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카톨릭을 지지하는 남부독일의 제후국인 바이에른의 대공들이 반종교개혁을 수행하였다. 1555년 조약 당시 독일은 전체 5분의 4가 개신교였으나 반종교개혁으로 많은 제후국들이 다시 카톨릭으로 돌아섰다. 독일에서 카톨릭 세력이 확대될수록 신교와 구교간의 긴장이 더 커졌다. 보헤미아에서도 반종교개혁을 수행하려는 합스부르크가의 무력적인 시도에 신교파도 무력으로 대응함으로써 30년 전쟁(1618-1648)이 일어났다. 이는 전유럽의 대결로 확산되어 종교적인 대립과 정치적 대립이 충돌하였다. 30년 전쟁은 종교분열에 해답을 제공하지도 못한채 독일에 정치적 경제적인 큰 손상을 입혔다. 이 전쟁으로 독일의 대부분 지역이 황폐화되었고 인구가 격감했다. 독일이 이 전쟁의 폐허로부터 일어서는 데는 1세기가 걸렸다. 30년 전쟁은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 여러 나라 사이에 있었던 종교 전쟁으로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교 사이에 벌어졌던 최대 종교전쟁이다. 합스부르크가(家)의 카톨릭교에 의한 독일 통일책에 대하여 대제후(大諸侯)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도화선이 되어 덴마크군과 스웨덴군이 독일에 진주하였고, 후에 프랑스군도 가담하여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끝이 났다. 베스트팔렌 조약의 체결로 독일의 각 제후국은 독립국에 가까운 권력을 얻었다. 신성 로마 제국은 유명무실해졌으며,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었다. 이 조약을 끝으로 종교 전쟁은 마무리를 지었다.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프랑스의 유럽 제패와 프랑스 문화의 유럽 지배가 시작되었고 스위스와 네덜란드의 독립이 촉진되었으나 독일의 국토는 황폐해지고 정치적 분열과 문화 발달이 뒤지는 원인이 되었다.
1618년 종교직전 중부유럽의 모습
1625년 덴마크 개입
덴마크왕 크리스티안 4세는 이 기회를 틈타서 영국과 네덜란드의 원조를 확보하고 25년 북독일에 침입하였다.곤경에 빠진 황제는 발렌슈타인을 황제군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고, 발렌슈타인은 바이에른 사령관 틸리와 협력하여 크레스댠을 격파하고 29년 뤼베크화약을 체결하였다. 크리스티안 4세의 패배와 1629년의 뤼베크 평화조약으로 유럽 강국으로서의 덴마크 지위는 종말을 고했다.
1630년 스웨덴 개입
발트해역에서의 세력확장을 꾀하고 있던 스웨덴왕 구스타브 아돌프는 황제 세력의 북진에 위협을 느끼고, 프랑스의 원조를 얻은 다음 30년 포메른에 상륙하여 보헤미아까지 진출하였다. 황제는 발렌슈타인을 다시 황제군 총사령관으로 기용하였다. 발렌슈타인은 32년 뤼첸싸움에서 구스타브를 전사시켰지만 전쟁에는 패했다. 황제는 화평책략을 이유로 34년에 발렌슈타인을 암살하고 에스파냐의 원조를 받아 신교파군을 제압하였고, 35년에는 대부분의 신교파 제후들과 프라하조약을 체결하였다.
1635년 프랑스 개입
프랑스는 30년 전쟁 개시 이후 항상 반(反)합스부르크의 흑막적 존재로서 신교파에게 원조를 하고 있었는데, 신교파가 약하게 되자 공공연히 전쟁의 정면무대에 등장하여 프랑스군은 남부독일로 침입하였고, 스웨덴군도 공격을 재개하였다. 그 후 황제군은 수세에 몰리게 되자, 오랫동안의 전쟁에 지친 황제와 독일 제후, 그리고 스웨덴 사이에 45년 이후 화평교섭이 이루어져, 48년 베스트팔렌조약이 성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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