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시가 풍요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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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풍요> 고찰
1. 내용 요약
가. 작품 전문 해석 및 이해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러운 이 많아라
서러운 중생의 무리여
공덕 닦으러 오다
불교 입국의 성세이던 신라 선덕여왕 치세에 영묘사 장륙 삼존불조성이라는 일대 불사와 관련하여 불려진 풍요는 경주의 사녀들이 泥土供養하러 가면서 부른 공덕가다. 이 노래는 이 불사가 끝난 뒤에도 경주지방에서 계속 구전되었던 듯 고려 때 맞절구질하는 주민들 사이에서 이 노래가 행하여졌다. 한 시대의 민요라 할 풍요가 허구많은 주제를 두고, 하필 불공덕을 노래했다는 점에서 그 나라와 그 시대의 불교적 분위기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풍요는 그 가요의 성격(민요)상, 특정한 작자를 생각할 수 없는 노래이나 영감을 받아 장륙상 조성에 종사한 양지에게 영적으로 동화한 사녀들이 ‘성상’ 조성에 泥土供養하면서 그 영적 체험을 가화한 것이다. ‘풍요’는 군중이 단순히 흙을 나르며 부른 노동요라기보다 일대불사에 공양주로서 동참한 성도들이 성토를 공양하며 부른 노래로, ‘爭運泥土’자체 祭儀實修로 간주된다. 고려 때에 절구질하며 부른 본가의 경우도 팔로 손으로 노역하는 한편 입으로 공덕가를 불러 불공을 쌓으려고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황패강, 「‘風謠’에 대한 一考察」, 『신라문화제학술발표회논문집』7(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1986), p.p.101-102.
뒤에 더 논의하겠지만 「풍요」는 단순한 노동요로만 생각할 수는 없는 노래이다.
나. 배경설화
석(釋, 스님에 대한 존칭) 양지(良志)는 그 조상과 고향이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선덕왕대에 그 자취를 세상에 드러냈을 뿐이다.(...) 그가 영묘사의 장륙존상을 소조할 때 마음을 고요히 하여 삼매의 경지에 드는 태도로써 그 질료를 이기고 주무르는 방법을 삼았다. 그래서 온 성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날라주었다. 그때 부른 풍요는 이러하다.(...)
이 민요는 지금도 그 지방(경주지방) 사람들이 방아를 찧을 때나 역사를 할 때에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 그때에 남녀들이 진흙을 나르던 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삼국유사』 의해(義解) 제5편 ‘양지사석(良志使錫)‘조>
2. 주제: 일을 하며 불렀던 불교 공덕가
(처음에는 불교 공덕가로 불리던 노래였을 것이나 이후에는 불교 공덕의 의미를 지닌 노동요로 널리 불려졌다고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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