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 평전 (한국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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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김교신 평전
(한국교회사)
1장 기독교의 교훈은 좋으나
190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김교신은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교신이 세 살 때인 이십대 초반 사망했다. 아버지의 이른 죽음이 하늘 아버지에 대한 갈망으로 이끈 것 같다. 어머니는 유가적 분위기와 기독교 신앙이 어우러지면서 언행이 엄격하고 가도가 정연하였다. 김교신의 학자적 기질, 신앙적 자세, 신앙교육법, 심지어 애국심까지 유교에 토대를 두었다고 보는 이도 있다. 그는 성격이 단도직입적이어서 부당한 일에는 타협이 없었다. 김교신은 학창시절 기독교를 하나의 도덕이나 윤리적 가르침으로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기도와 기적은 미신 혹은 비과학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유교에 충실했고 자연과학을 신뢰했다. 1919년에는 함흥에서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인해 31운동 직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2장 일본 유학과 입신의 여정
김교신은 도쿄 영어 예비학교에서 학문적인 것보다는 히사부로 선생의 생활태도에 강렬한 인상을 받는다. 1922년 그는 도쿄사범학교 영어과에 입학한다. 이듬해 지리 박물과로 전과하였다. 이는 서적보다 자연에서 직접 가르침을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와 선대 조상들이 일찍 죽은 이유를 과학적으로 풀고 싶었다. 이런 박물적 지식이 그가 성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방편이 되었다. 유학 생활 중에 신앙의 토대를 닦아 주었던 스승 우치무라 간조를 만난다. 몇 개월만 교회를 다녔지만, 교회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교회 생활을 통해 조직 교회에 대한 한계점을 알 수 있었다. 일본적 기독교는 외국인의 중재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일본인이 직접 받은 기독교를 의미한다. 무교회주의는 신앙보다 교회를 우선시하는 것, 교회와 기독교를 동일시하는 것, 교회 없이 기독교 신앙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에 반대하는 사상이다. 김교신은 일본과 예수님을 사랑했던 우치무라에게서 기독교 신앙으로 조선과 조선인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또한 그는 유교가 말하는 성인의 길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죄인을 의롭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었다.
3장 조선을 성서 위에 세워야
김교신은 조선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그때 송별회에서 모 학교 교장이 던진 권면은 평생 그의 뇌리에 사라지지 않았다. 이는“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이다. 하나님과 천국에 마음을 둘 때 그것이 보물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동해 상 연락선 갑판 위에서 김교신은 사해동포의 허상, 조선인도 일본인과 다르지 않다는 꿈을 깰 수 있었다. 다른 조선인과 구별됨으로써 조선인을 초극하여 세계인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그가 이제 자신을 진정 다른 조선인과 일치시키고 조선인 콤플렉스를 극복한 것이다. 김교신은 1927년 일본에서 만난 동료들과「성서조선」을 창간한다. 이를 편찬한 목적은‘조선을 성서화’하기 위해서였다. 류석동은 조선 사랑이 김교신의 적혈구 전부까지 점령했다고 말했다. 그가 보기에 조선은 인류사에 큰 공헌을 할 수 있는 살아있는 무대였다. 김교신은 조선인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신실하고 의롭게 살아가지 못한 죄로 이해했다. 김교신은 성서 위에 조선을 굳건히 세움으로써 조선을 성서화 하고, 조선인이 성서의 진리로 살기를 바랐다. 여기에 조선의 구원이 있다고 믿었다.
4장 공덕리의 특이한 집
김교신은 서울로 이사 온 후 공덕리에 거주하였다. 김교신은 오늘날 중학교 3학년 나이에 아버지가 되었다. 그의 자녀 양육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훈련장이었다. 김교신은 자녀를 키우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아픈 가슴을 알게 되었다. 그는 도덕적으로 민감한 사람이었다. 또한 김교신은 설을 양력으로 보냈다. 이는 음력설이 민족적인 행동과 관련이 없으며, 양력설을 쇤 이유는 과학적 사고 습성 때문이었다. 김교신은 가정예배를 드렸다. 이처럼 김교신의 집은 공덕리 특이한 집안이었다. 제사도 지내지 않았고 설날에도 세배와 음식 준비로 분주하지 않았다. 저녁에는 매일 성서를 읽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집에 돌아오면 두루마리를 입고 짚신을 신었다. 외출 시에는 큰 절로 행선지를 어머니께 알리고 돌아올 때로 예외가 아니었다. 기독교와 유교의 분위기가 조화된 집안이었다.
5장 양칼 같은 지리 선생
김교신은 술과 담배 문제에 엄격하였다. 당시 양정에는 부모의 생일에 동료 직원들을 초청하여 식사하는 관행이 있었다. 연회에서 술을 내놓아야 하는 것은 철칙이었다. 그는 사직서를 품고 살기 감도는 연회를 배설했다. 또한 그는 지리 수업을 인물과 역사 위주로 가르쳤다. 이것은 자신이 이십 년을 공부했어도 한 시간의 조선사를 배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교신의 수업은 학과 공부 자체보다 독립된 인격과 민족애를 간직하기를 원했으며 인성 교육도 중시했다. 김교신은 양정학교에‘물에 산에’라는 등산부를 만들었다. 그는 조선의 국토를 통해 조선의 역사, 조선인의 정신, 조선인의 마음과 생활을 가르쳐 주고 싶어 했다.‘물에 산에’는 지덕체를 겸비한 통합적 교육이었다. 한발 더 나간다면 자연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김교신에게 별명이 몇 개 있었다. 이중‘양칼’은 그의 엄격함을 드러내는 별명이었다.
6장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생의 기독교
김교신의 교회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우치무라 간조다. 그는 제도적 교회를 비판했고, 예수님이 말한‘에클레시아’는‘집회’라는 일상적 의미였다고 주장했다. 그는‘교회 없는 기독교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 서양의 선교사들을 비판하였다. 곧 간조는 구원받기 위해 교회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무교회주의자들이 거부한 것은 신자들의 모임이 아니라 교회를 예배당이라는 건물과 동일시하는 것, 제도적 교회를 신성시하거나 절대시 하는 것, 교회 조직과 교회 내의 위계적인 성직자 제도, 교회를 구원의 매개로 생각하는 것, 구원을 받으려면 세례와 성찬을 해야 한다는 것, 교회 안의 비진리비성서적 행위 등이었다. 무교회주의자들은 이를‘교회주의’나‘교회지상주의’라고 불렀다. 이처럼 무교회주의는‘교회’가 아닌‘교회주의’를 거부한 사상이다. 또한 김교신에게는 생활 전체 일거일동이 예배다. 그에게는 자연과 계절의 변화는 하나님을 만나고 느끼고 삶을 성찰하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였다. 김교신은 삶을 하루 단위로 살아나갔다. 즉 생의 기독교이다. 그는 믿음이란“자기의 전 생명을 그리스도에게 넘겨주는 일이며 나를 바치지 않는 이상 신앙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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