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조선적 기독교- 조선적의 문제, 조선적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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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조선적 기독교
1. 머리말
한국교회사에는 1910-30년대 반서구적, 반선교사적인 경향을 보이며, 선교회와 단절된 독립적인 조선적 교회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1910년대 최중진과 김장호는 기존 주류교단과 갈등을 빚으며 장로교단교에서 쫓겨나거나 자진으로 탈퇴하여 독자적인 자유, 독립교회를 설립하였다. 1923년에는 이만집이 경북노회와 갈등을 빚으며 분립하여 조선기독교회를 설립하였다. 이 교회들은 반선교사적 경향을 보이면서, 미국 선교회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던 장로교 노회를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분립 후 반선교사적 경향이 노골화되기 때문에 교회의 분립에 서구교회로부터의 경제적인 독립의 의지가 작용했는지는 의심스러운 면이 있다. 또한 이들에게 조선적 신학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지도 의심스럽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조선적 교회의 설립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조선적 기독교’를 추구해갔던 이들과는 차이가 있다.
조선적 기독교를 추구했던 이들은 선교회로부터 정치, 경제적인 자립뿐만 아니라 내용에서도 독자적인 신학을 수립하려는 노력을 벌였다. 김교신, 최태용은 반선교사적인 독립교회를 지향했던 경향이 두드러져 보인다. 이용도이호빈의 예수교회는 유명화의 신탁과 장로교 노회의 이단 정죄 등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독자적인 노선을 걸어갔는데 예수교회에는 기성교회와는 차별되는 독특성이 발견된다. 김인서는 선교회와의 협력을 전제한 기성교회 안에서의 조선적 신학을 주장하였는데 그런 면에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본 소론에서는 이들 네 명을 중심으로 조선적 기독교를 당시 조선교회에 대한 개혁적 관점에서 해석해 보고자 한다.
2. 연구경향
한국교회사에서 조선적 기독교를 추구했던 이들은 비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한국에서 서양 기독교로부터 독립을 추구했던 종파들은 대부분 기성 교단의 노회와 충돌이 생기거나 이단으로 정죄되어 분리 독립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독립, 자치를 추구했던 이들을 이단으로 치리했던 주류 교단은 이들에게 정당한 역사적 자리를 주기가 쉽지 않다. 조선적 기독교를 추구했던 김교신과 최태용은 무교회주의자라는 이유 때문에 일찍부터 주류교단으로부터 이단시되었고, 오늘날 보수적인 교단에서는 이들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다. 거기다가 학자들의 입장과 조선적 기독교 그룹의 신학적 특성에 따라 그 평가를 다르게 하고 있다. 반대로 조선적 기독교를 추구했던 이들과 소종파를 직접적으로 계승한 쪽에서는 자신들의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미화하는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다.
소종파와 조선적 기독교를 정리해야 하는 이유는 먼저 자신이 속한 자리를 떠나 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당시 일어났던 소종파와 조선적 기독교의 움직임을 종교적, 역사적, 객관적으로 고찰하고, 평가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通史에서 소종파 운동과 조선적 기독교를 다루고 있지만, 그들의 유형이 어떻게 다른지,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에 대한 역사적인 연구는 아직 부족한 상황이다. 사가들이 속한 입장에 따라 異端(혹은 親日)과 改革이라는 양 극단의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 자체에 대한 보다 면밀한 실증적 연구는 그래서 생각보다 힘든 작업이 되어 버렸다.
3. 조선적 기독교에서 ‘조선적’의 문제
당시는 선교사들이 이식한 교파에서 독립하여 새로운 교회를 세웠다면 이단으로 생각하였다. 조선적 기독교를 추구했던 이들은 선교사의 치리와 군림, 조선인과 상관없는 교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흔히 ‘반선교사적 경향’이라고 부른다.
민경배는 조선적 기독교를 추구했던 이들의 반선교사적 경향이 흔히 친일의 함수로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민경배,『한국민족교회형성사론(개정판)』(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8), 168.
이는 예리한 분석이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의 경우 이는 소종파 교회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조선기독교회에 해당하는 문제였기 때문에 민경배, 『교회와 민족(개정판)』(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2007)의 ‘머리말’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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