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과 선화공주의 실체 고찰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16.04.16 / 2016.04.16
  • 3페이지 / fileicon hwp (아래아한글2002)
  • 평가한 분이 없습니다. (구매금액의 3%지급)
  • 800원
다운로드장바구니
Naver Naver로그인 Kakao Kakao로그인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이전큰이미지 다음큰이미지
본문내용
서동과 선화공주의 실체에 대한 고찰
서동 설화는 『삼국유사』를 통해 전승되었다. 그에 의거해 서동 설화의 주인공을 백제 무왕과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로 바라보는 시각이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런 가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줄곧 있어왔다. 『삼국유사』를 제외한 어느 기록에서도 서동 설화를 찾을 수 없다는 점, 『삼국사기』에 기록된 당대 백제-신라의 적대적 외교 관계로 미루어 양국의 결혼 동맹이 성립되기 어렵다는 점 등이 그 비판을 뒷받침해왔다. 더욱이 2009년에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에 기록된 무왕의 왕후 사택적덕녀의 존재가 그 비판을 더욱 증폭시켰다.
한편 『삼국유사』 무왕조 말미에 ‘삼국사에 이르기를 (서동을) 법왕의 아들이라 하였는데, 여기 전하기를 과부의 아들이라 한다(三國史云是法王之子 而此傳之獨女之子未詳)’는 구절로 미루어 볼 때 저자인 일연 또한 의문을 남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서동을 무왕으로, 선화공주를 진평왕의 딸로 단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서동과 선화공주의 실체에 대한 이견들에 대해서 알아봄으로써 그 실상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에 본 장에서는 기왕의 논의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우선 서동을 무강왕으로, 선화공주를 익산의 토착세력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삼국유사』 무왕조는 ‘고본에는 무강이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백제에는 무강이 없다(古本作無康非也百濟無武康)’로 시작된다.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은 백제에 무강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강(武康)’을 ‘무왕(武王)’으로 치환하여 동일시하였다. 그러나 마한 소국 중 건마국(乾馬國)의 무강왕에 대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바, 무강왕을 백제의 무왕으로 볼 수 있는 뚜렷한 근거는 없다. 김성기, 「서동요에 대한 시고」, 『송하 이종출 박사 화갑기념 논문집』, 영창서림, 1989, p.70.
『신증동국여지승람』 익산군조를 보면 무강왕이 금마군(金馬郡)에 처음 나라를 세우고 임금 자리에 오른 것을 알 수 있다. 宋乙開記金馬郡昔武康王稱王之地…世傳武康王旣得人心立國馬韓…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익산군조.
또한 참마(薯)를 경작해서 어머니를 모시던 서동이 마밭에서 오금(五金)을 얻었고, 그 뒤 임금의 자리에 올라 서동대왕으로 불렸다는 내용이 있다. 서동대왕은 ‘마를 경작한 아동의 임금’이라는 뜻으로 정식 왕호인 무강왕에 대한 별칭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성기, 앞의 논문, p.71.
이러한 무강왕 설화가 전승과정에서 백제의 무왕 설화, 즉 서동 설화로 탈바꿈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백제의 동성왕(東城王)과 신라의 소지왕(炤知王)대에 국혼이 맺어진 사실과 관련하여 동성왕을 서동에 비정하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삼국사기』 동성왕조 15년에 ‘봄 3월에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신라왕에게 혼인을 청하니 이찬 비지(比智)의 딸을 시집을 보냈다(春三月王遣使新羅請婚羅王以伊比智女歸之)’라는 기록이 있다. 동성왕-소지왕대는 고구려의 남침을 대비한 혼인동맹을 통해 양국 간의 우호관계가 진전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백제의 신라 침공이 잦았던 무왕대에 비해 서동 설화의 시대적 상황에 더욱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동성왕의 휘(諱)는 ‘모대(牟大)’, ‘마제(摩帝)’ 혹은 ‘말다왕(末多王)’이라 전하며, 이들은 ‘맏동’과 그 발음이 유사하고, ‘맏동’이 한자화 되면 ‘서동’이라는 점에서 서동 설화의 서동과 그 음이 일치한다. 김성기, 앞의 논문, p.63.
따라서 서동설화의 서동을 동성왕으로, 선화공주를 신라 이찬 비지의 딸로 비정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서동이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참요(讖謠)를 퍼트린 내용과 관련하여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혼인을 주목하는 시각도 있다. 서동을 무왕으로 선화공주는 신라의 공주로 보는 견해가 정설로 받아들여져 왔기 때문에 서동과 선화공주의 혼인을 백제와 신라의 국혼으로 보는 고정된 시각이 있어왔다. 그러나 서동과 선화공주의 혼인을 국혼으로 바라보기에는 정황적인 제약들이 많다는 점에서 오히려 신라 내에서의 혼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 『삼국유사』 원효불기(元曉不羈)에 따르면 원효대사의 아명이 ‘서당(誓幢)’이었다는 점, 참요 누가 내게 자루 빠진 도끼를 주려는가./내가 하늘 괴는 기둥을 깎겠다. 『삼국유사』제4권 원효불기.
를 퍼트려 왕의 혼인 승낙을 얻어냈다는 점, 원효가 신당(新幢)이라는 절을 지었다는 점 등에서 서동과 공통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이 확인된다. 이 내용들은 서동설화의 내용과 상당부분 일치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 원효를 서동으로, 선화공주를 요석공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김성기, 위의 논문. p.65.
마지막으로, 서동요를 순수하게 불교적으로 해석한 입장도 있다. 『관음찬(觀音讚)』에 ‘관음보살이 말없이 설법을 하시고 남순동자는 듣지 않고도 설법을 알아듣는구나(觀音菩薩無所說而設 南巡童子不聞而聞)’이라 하였는데, 이는 서동 설화의 ‘공주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저 우연히 믿고 좋아하니 서동을 따라가면서 비밀히 정을 통했다(公主雖不識其從來 偶爾信悅 因此隨行 潛通焉)’와 비교하여 유사성을 갖는다. 또한 서동요에서 ‘善花公主님은 맛동書房을 밤에 몰래 안고 가다.’라 했는데, 관음은 종종 여성의 몸으로 분해 밤에 남자의 거실에 왕래하면서 그들의 수도를 도운 보살이었다. 또한 서동의 출생과 그 경력이 전설적인데다 그가 신라로 선화공주를 미행 한 일은 백제에서 볼 때 동남행의 길이라는 점 등으로 보아 선화공주는 불교의 관음보살이고 서동은 보처인 남순동자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김성기, 위의 논문, p.66.
위의 가설들은 모두 일면 타당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각각의 설들은 모두 온전히 정설로 받아들여지기엔 한계들이 존재한다. 서동을 건마국의 서동, 즉 무강왕으로 보는 견해는 건마국 혹은 인근 지역에 마한의 소국인 백제국(伯濟國)이 건국되었고 다시 백제로 계승되는 과정에서 무강왕 설화가 무왕 설화로 변형되어 전승되었다고 본다. 김성기, 위의 논문, p.76.
하지만 이 견해는 ‘백제국’이 익산 근방에서 건국되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입증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타당성을 전제하기 힘들다. 따라서 서동을 무강왕으로, 선화공주를 익산 유력세력의 딸로 비정하는 데는 비약적인 부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서동 설화와 동성왕과 신라 이찬 비지의 딸의 혼인은 결혼하는 과정과 역할에 있어서 차이를 보인다. 동성왕과 이찬 비지의 딸의 혼인은 남녀 간의 사랑에 의한 것이 아닌, 나제동맹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적 성격이 강한 것, 동성왕과 결혼 한 여인이 신라의 공주가 아닌 귀족의 자제였다는 것 등에서 서동 설화와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매우 많다고 할 수 있다. 박현우, 위의 논문. p.16.
한편 서동 설화와 원효의 일화는 내러티브에 있어서의 유사성이 많지만, 서동 설화의 의의는 미륵사 창건에, 원효 일화의 의의는 원효의 파계와 설총의 탄생에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한 서동 설화의 공간적 배경은 백제, 원효 일화는 신라라는 점에서도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이런 점에서 일연이 『삼국유사』를 집필 할 당시 두 설화는 각각 개별적으로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엄연히 다른 설화 인 것이다. 박현우, 위의 논문. p.17.
이와 같이 특정한 설을 정설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서동 설화의 형성 과정상 한 시대가 아닌 여러 시대에 중첩되어 형성되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서동과 선화공주가 동시대 인물이라는 통념에서 벗어나 더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자료평가
    아직 평가한 내용이 없습니다.
회원 추천자료
  • [고전시가] 향가
  • 서동요〉는 상황을 전도시키는 아이러니,〈혜성가〉는 상징과 완곡법(婉曲法),〈보현십원가〉는 바다와 물의 이미지를 통한 상징법이 두드러지게 보인다. 이처럼 향가의 수사적 특성은 서정시가로서 보일 수 있는 표현기교를 두루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Ⅱ. 작품 연구03. 향가(鄕歌) 서동요 1. 서동요(薯童謠)ꊱ 원문(原文)善花公主主隱他密只嫁良置古薯童房乙夜矣卵乙抱遣去如語句풀이▪ 善化公主主隱(선화공주니믄) : 선화공주님은  ▪

  • 동북공정에 대한 우리의 고찰
  • 고찰 해보는 것도 많은 의의가 있다. 대응방안을 고찰하며 국내외적으로 국민들의 단합을 유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내적으로는 정부와 국민들의 일체된 정책을 시행하므로 정부정책의 떨어진 신뢰를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다. 국외적으로는 남과 북이 단결된 방안을 모색함으로써 역사에 길이 남을 남북공조의 모범적 사례로 남게 될 것이다. 또한 이렇게 단결된 국내외적인 이미지는 국제적으로 우리나라의 단결된 한민족적인 좋은 이미지를 널리

  • [방송대,] 구비문학개론 요약
  • 고찰*삼국사기의 유리왕 원년 기록이 최초. 일곱 모가 난 돌 삼국유사: 진지한 공적기능 수행, 열어 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3색으로 그린 모란. 자루 없는 도끼, 하늘 떠받칠 기둥. 1925년 본격적으로 채록. 조선총독부 편 朝鮮の謎, 최상수 조선수수께끼 사전 *시대 변화에 몹시 민감하다. 3) 유형 및 기능◆ 유형분류: 수수께끼가 되게 하는 원인에 따른 분류*음성적 유사성 근거

  • [역사학] 삼국시대
  • 서동이 신라의 선화 공주를 데려올 때, 신라 어린애들에게 노래를 가르쳐서 부르게 했다는 데에서도 두 나라의 언어가 같았음을 알 수 있다.Ⅱ. 삼국과 중국삼국 중국의 외교관계에대해 살펴보면 삼국은 중국의 침략 세력에 맞서 과감히 항쟁하였다. 고구려는 민족의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국가 체제의 정비 과정에서 필요한 중국 제도 율령, 불교, 유학 등을 적극 수용하였다. 중국의 분열(위․진 남북조)을 교묘히 이용하였다. 소수림왕 때는 전연의

  • 향가의 성격에 관한 고찰 향가의 성격에 대한 쟁점 중심으로
  • 고찰’이 한 없이 부족하다는 점과, 이런 개인적인 분류가 한계에 봉착했음을 인정한다. 앞으로 이런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후일 다시 한 번 연구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왔으면 하는 생각으로 본고를 마치고자 한다. Ⅴ. 참고문헌 정민, 「한국 고전문학의 고전주의적 이상」, 한양대학교, 2000.김진욱, 『향가문학론』, 도서출판 역락, 2003이능우, “향가의 마력”, 『현대문학』21호이태극, “고대시가에 나타난 무격관”, 『예술논문집』 10호, 대한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 최근 판매 자료
    저작권 관련 사항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진실성에 대하여 레포트샵은 보증하지 아니하며,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 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됩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업자등록번호 220-06-55095 대표.신현웅 주소.서울시 서초구 방배로10길 18, 402호 대표전화.02-539-9392
    개인정보책임자.박정아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17-서울서초-1806호 이메일 help@reportshop.co.kr
    copyright (c) 2003 reoprtshop. steel All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