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근대화론 비판 - 1 식민지 근대화론 2 식민지 근대화론의 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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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식민지근대화론 비판
1. 식민지 근대화론
1. 식민지 근대화론의 의미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제의 식민 지배를 통하여 조선이 근대화 되었고 나아가 한국이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다는 견해를 총칭하는 것이다. 우리가 1960년대 이래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하여 신흥공업국(NICs, NIEs)에 이르게 되자, 이러한 한강의 기적을 가져온 원인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작업들이 국내외에서 진행되었다. 이 문제에 관해 그 동안 식민주의 사관에 기초하여, 망언을 되풀이해 오던 일본 학계가 먼저 나서게 되었다. 그들은 과거 일본에 지배하에 있던 한국과 대만이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있는 것에 착안, 두 나라가 아시아에서 신흥산업국에 도달하게 된 것은 과거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도출하게 된 것이다. 일본에서 이러한 논의는 일본의 경도대학의 中村哲 교수의 활약이 크다. 그는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의 경제 성장을 일본의 식민지배가 요인이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도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한 학자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서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인 안병직과 그의 제자인 이병훈이다. 이들은 언급한바와 같이 일본경도대학 교수인 나카무라 사토루의 『근대세계사의 재검토』라는 논문에서 주장한 증진자본주의의 개념을 안병직이 이어받게 된다. 나카무라 사토루의 증진자본주의는 동아시아 신흥공업국(NICs)들은 식민지배를 받음으로서 전근대적 사회경제구조가 해체되고 그 위에 본국에 종속하는 경제구조가 이식되고 그 과정에서 본국의 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가 급속하게 발달되었다는 논리이다. 또한 안병직의 제자 이영훈은 경제의 여러 지표에서 조선사회가 정체하고 있었고 19세기 들어서면서 정점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요지는 한국의 내재적 발전론을 부정하며 한국의 자본주의가 일제시대 사회경제구조의 변화를 배경으로 성장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식민지 근대화론의 등장 배경에는 그동안 한국 근대 사학계가 너무 식민지 수탈론에만 얽매여 있었다는 지적도 있지만 이는 수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데서 비롯한 것이다.
2.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
일제시대에 조선사회 정체론을 근거로 하여 일제의 식민지지배를 정당화하려 했던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해 해방 후 역사 연구자들은 조선후기 사회가 내적으로 다양한 발전의 토대를 구축하고 있었다는 주장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이른바 ‘내재적 발전론’ 이다.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한 한국근대사 인식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 후기에 성장하였던 자본주의의 맹아는 타율적인 개항과 일제의 침략에 의해 왜곡되었다. 이는 동학혁명 등 조선사회의 봉건적 요소를 타파하고 근대화로 나아갈 수 있는 민중적인 동기를 일본과 봉건 왕조가 무참히 짓밝아 버렸다. 그래서 보다 진보적인 발전은 억압되고 자주적인 과정의 의한 발전을 가로 막아 버렸다. 또 이러한 방향의 연구는 식민사관을 극복할 수 있게 하였으며, 한국사의 발전과정을 세계사에 일반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하는 데 기여하였다. 내재적 발전론의 인식을 한국사의 각 시기별로 나누어 살펴보면, 첫째 조선후기 사회에서 봉건제의 해체적 양상이나 자본주의의 맹아를 검출해내고, 둘째 이러한 역량이 성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근대사회를 수립하지 못한 채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되는 내적, 외적 조건들을 주시해야 한다. 셋째 그 과정에서 해체가 지연된 봉건적인 유제가 식민지사회에서도 그대로 온존하면서 파행적인 사회구조를 지니게 되었음을 입증하고자 하였다.
첫째 과제는 농업. 수공업. 상업 등 모든 생산 분야에 걸쳐서 생산력의 증대나, 자본주의적인 관계들의 맹아를 찾으려는 노력으로 나타났으며, 이른바 자본주의맹아론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또 조선 후기의 부세제도의 문란이나 농민반란 등을 봉건제의 해체적 양상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 맹아론이 부조적 역사인식이라는 비판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 과정에서 조선 후기사회의 역동적인 변화 모습을 검출한 것은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둘째 과제, 즉 이러한 주체적 역량의 성숙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발전 혹은 자본주의화에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에 관해서는, 외적으로는 그러한 자본주의적 요소가 충분히 성숙하기 전에 제국주의국가에 의해 지배당했기 때문이지만, 내적으로는 봉건세력이나 봉건왕조의 정책에 의해 발전이 저지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자주적인 자본주의화를 지향하려는 움직임과 이식된 자본주의 사이의 대립이 보이지만, 결국 후자가 승리한다는 것이다. 셋째 과제는 민족경제권의 축소라거나, 혹은 기형성, 파행성 등을 주장하는 논의 등으로 나타났다. 이는 한반도에서 경제성장은 확인되지만 그것은 일본경제의 외연적 성장 즉 일본자본주의의 성장에 불과한 것이며, 한국자본주의라 할만한 부분은 위축. 후퇴되었다는 시각에서 파악한다. 식민지시대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지나치게 강조될 경우 그 왜곡된 측면이나 수탈의 측면만이 부각되기 마련이며, 그 반대로 식민지 이전 시기인 조선후기나 특히 대한제국 시기는 상대적으로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평가될 소지가 크다. 전자의 성향이 가장 노골적으로 나타난 것이 사업을 수탈론적 관점에서 파악한 것이며, 후자의 성향은 특히 광무정권에 대한 재평가작업으로 나타나고 있다. 수탈론에 입각한 제국주의의 폭압성 강조는 식민지지배의 죄악이나, 그것에 대항한 투쟁의 역사적 정당성을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는 해방 후 외향적 성장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맞물리면서 민족 개념을 저항이데올로기로 전화시키는 기능을 하였다.
식민지근대화론은 식민지 시기 한국경제의 성장을 확인한 후, 그 과정에서 한국인의 경제활동 역시 성장하였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내재적 발전론과는 정반대의 입장을 보이고 있다. 특히 현재의 한국자본주의의 발전을 염두에 두고 그것의 기원을 식민지 시기에서 찾으려고 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내재적 발전론의 역사인식이 현대로 확장되면서 한국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은 파행적이었으며, 해방 이후에도 이러한 파행성은 여러 이유로 극복되지 않은 채 확대되어왔다고 본다. 반면 식민지근대화론은 최근 수십년간 지속되어온 한국자본주의의 고도성장에 대하여 일제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에 기초하고 있다. 식민지근대화론은 한국자본주의의 역사적 기원을 식민지시대, 나아가 전근대사회에서 구하고 있는데, 특히 식민지시대의 자본주의의 발전을 현대 한국의 고도성장과 연결시킨 것은 학계와 국민들에게는 가히 충격적이다.
3. 식민지 근대화론의 전개과정
세계학계에서는 제국주의적인 시각에서 과거 식민정책이 피식민지의 경제를 성장시켰을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주장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제국주의적 인식은 멀지 않아 한국에도 비판적으로 수용되었다. 이것은 제국주의적 시각의 학문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留學이라는 환경과, 경제성장 제일주의를 주장하던 유신통치의 이데올로기적 분위기가 맞물려진 상황에서 수용되었는데, 식민주의에 대한 이같은 견해들의 속출과 함께 일제 강점기를 수탈론적 시각에서 이해하던 인식이 성장론적 시각으로 변화하는 조짐들이 일본의 경제사학계를 비롯하여 미국과 한국의 학계에도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다시 언급해 보건대 식민지 근대화론이 학계의 차원으로 전화되는 것은 京都大學 교수 中村哲의 활약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는 동아시아 NICs 4개국이 급속한 자본주의화를 달성한 요인을 그들이 갖는 공통점에서부터 전반적으로 검토하였다. 말하자면 그들 나라가 다 같이 식민지였으면서도 다른 독립국가였던 나라들보다 먼저 근대화를 달성한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가 제시한 공통점은 4개국이 영국과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 외에 첫째, 식민지화에 의하여 구사회=전근대적 사회 경제구조가 꽤 철저하게 파괴되고 해체되었다는 것, 둘째, 그 위에 본국에 종속하는 경제구조가 다른 식민지에 비하여 보다 깊이 만들어졌다는 것, 셋째, 그 과정에서 본국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경제가 급속하게 발달했다는 것인데, 한국과 대만이 특히 이 세 가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며, 바로 이러한 점들이 동아시아 NICs의 중요한 역사적 조건의 하나였다고 주장하였다. 즉 식민지가 되어 구사회가 철저히 파괴되고 식민지 본국에 더 철저히 종속화되어 본국으로부터 더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러한 정지작업을 기초로 하여 본국자본이 활동할 공간이 커졌기 때문에 식민지자본주의의 형성이 가능했다는 뜻이다. 中村은 이같은 발상을 근거로하여 위의 세가지 공통점과 관련시킬 사건을 일제 강점기의 한국사에서 제시하였다. 시대별로 토지조사사업(1910년대)과 산미증식계획(1920년대~30년대 전반), 일본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급속한 공업화(1930년대 후반~1940년대 전반)을 들어 간단하게 검토하였다. 中村은 일제 식민지지배의 커다란 특징의 하나로서 토지소유관계의 철저한 개혁을 들었는데, 이는 농촌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식민지경제 내로 편입해 들이기 위한 기반조성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든지 자본주의화를 위해서는 전근대적 토지소유관계를 폐지하고 자본주의에 적합한 토지소유관계 즉 근대적 토지소유를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되는데, 식민지치고 이렇게 철저한 토지개혁을 단행한 제국주의가 없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또 토지개혁과 함께 지세를 개정했는데 그 목적은 자본주의화정책과 식민지 지배를 위한 재원의 확보와 일제에 종속하는 경제구조의 편성 및 식민지 지배의 지주로서 식민지지주제를 육성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종래의 연구가 일인지주의 토지수탈과 식민지권력의 국유지수탈을 강조한 것과는 달리, 전근대적 토지소유관계를 폐지하고 근대적 토지소유관계를 만들어내고 농촌에 대한 상품경제의 급격한 침투, 농민층 분해, 지주제의 발달, 과잉인구 저임금노동력 창출의 기반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하였다. 中村은 산미증식계획의 결과, 농업의 상품생산화와 외래기술, 식민지 지주제의 고도한 발달과 농민의 대량 몰락, 과잉인구 형성과 농촌인구의 다량유출 등이 2차대전 전에 그 규모와 속도에서 유례를 볼 수 없을 정도로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되자 한국에서는 전근대적 경제구조의 파괴 해체와 제국주의 본국경제에 종속된 경제구조가 대규모로 형성되었으며 이는 곧 식민지형의 본원
참고문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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