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를 통하여 바라본 해미읍성과 솔뫼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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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천주교를 통하여 바라본 해미읍성과 솔뫼성지
1. 조선시대의 천주교
(1).조선시대 천주교 전개와 그 배경
(2).조선시대 천주교의 사회적 기능
(3).천주교 발전과정과 그 과정에서 일어난 박해 사례
(4).천주교 박해 원인
(5).천주교 전래의 의의
2. 해미읍성
(1).해미읍성 소개
(2).해미읍성 내 각 건물들의 명칭과 기능
(3).해미읍성의 역사적의의
3. 김대건 신부와 솔뫼성지
(1). 김대건 신부 소개.
(2). 솔뫼성지
(3). 솔뫼성지 내부 건물 및 기념물 소개
(4). 솔뫼성지의 존재 의의
조선시대 천주교의 전개와 그 배경
-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양 책들이 연구되면서 ‘서학’ 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생겼다. 서학은 서양의 과학 기술뿐만 아니라 종교에도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학문을 뜻한다. 이 무렵 중국에서 천주실의라는 천주교 교리 책이 전래되었다. 학자들은 처음에는 이를 학문으로서 연구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정조 때에는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오면서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 행해졌던 신앙 활동이 상민과 부녀자들에게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 조선 후기 서학(西學)을 조선에서 처음으로 수용한 계층은 이익李瀷의 문인들이었다. 이들은 중국에서 전래된 한문서학서를 통해 서학에 접근하기 시작했고, 이들 가운데에는 권철신(權哲身, 1736~1801)을 중심인물로 하여 이기양(李基讓, 1744~1802), 권일신(權日身, ?~1792), 정약전(丁若銓, 1758~1816) 및 이벽 등과 같은 일단의 학인들을 포용하고 있던 성호좌파星湖左派로 분류되는 집단들이 있었고, 서학은 주로 이들에 의해 수용·실천되었다.
이들은 대개가 양반 신분층이었고 기호남인畿湖南人으로서 중소지주적 특성을 가지고 있던 인물들이다. 이들의 가문은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이후 노론 세력에 의해 정치계에서 물러나 오랜 휴지기를 거치고서 정조 연간의 탕평책蕩平策에 힘입어 조정에 진출할 수 있었다. 초창기 서학에 접근했던 인물들 가운데 양반 출신 신도들은 서학에 입교하기 이전부터 이미 이단적 사상에 대한 관심이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드러나는 이와 같은 현상은 조선 후기 사회에서 태동되고 있던 조선 성리학에 대한 도전의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은 성리학을 대체할 새로운 문화를 수용하려는 입장에서 서학을 받아들였다.
조선시대 천주교의 전개와 그 배경
조선시대 천주교의 사회적 기능
- 당시의 서학, 즉 천주교는 사회적 순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는데 이는 바로 서학사상이 변화된 사회상을 인정해주고 있음과 동시에 사회의 변화를 촉진시켜 준다는 점이다. 당시 사회에서는 신분제도의 붕괴와 함께 백성들의 의식수준이 향상되어 가던 과도기였고 새로운 인간관과 평등성에 대한 자각이 강화되고 있었다. 천주교에서는 이러한 변화의 정당성을 교리를 통해서 설명해주고 있었으며, 또 다른 변화를 촉진시키고자 했다.
천주교 발전과정과 그 과정에서 일어난 박해 사례
병인박해 때의 모습을 담은 그림
단지 천주교를 신봉했다는 이유로 잔인하게 고문당하고 죽어야 했던 상황을 사실적이고 잔인하게 묘사했다.
신해박해
1791년(정조 15)에 일어난 최초의 천주교도 박해 사건. 진산사건(珍山事件)이라고도 한다. 전라도 진산의 양반 윤지충과 권상연이 윤지충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신주(神主)를 불사르고 가톨릭 식으로 제례를 지냈는데, 소문이 서울에까지 전해졌는데, 이에 두 사람을 사회 도덕을 문란케 하고 아버지도 모르고 임금도 모르는 사악한 종교를 신봉하였다 하여 사형시켰다.
신유박해
1801년(순조 1) 천주교도를 박해한 사건. 이 박해로 선교사 주문모를 비롯한 천주교인 100여 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되었다.
기해박해
1839년(헌종 5)에 일어난 제2차 천주교 박해 사건.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천주교를 박해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천주교에 관대한 안동 김씨로부터 권력을 탈취하기 위하여 풍양 조씨 세력이 의도적으로 일으켰다. 이 박해로 천주교인 100여 명 이상이 죽었다.
병오박해
1846년(헌종 12)에 백령도 부근 순위도 등산진에서 김대건 신부가 외국 선교사들이 안전하게 입국할 비밀항로를 개척하다가 체포되어 박해 받은 사건이다. 체포 후 효수 경중의 판결을 받아 서양 선박을 국내로 불러들인 역적으로 간주되어 김대건과 관련된 천주교인 9명이 사형 당했다.
병인박해
1866년(고종 3)부터 1871년까지 계속되었던 우리 나라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 사건이다. 이는 네 차례에 걸쳐 파동으로 전개되었다. 첫 번째는 1866년 봄에, 두 번째는 1866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세 번째는 1868년, 네 번째는 1871년으로 이어져 도합 8,000여 명 이상의 순교자를 내었다. 1868년의 세번째를 무진사옥, 1871년의 네번째를 신미사옥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대원군에 의해 계속 추진된 것이므로 병인박해에 포함시키는 것이 통례이다. 따라서 병인박해는 병인년(丙寅年)인 1866년 한 해의 박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뒤 6년간에 걸친 박해를 모두 지칭하는 용어이다.
천주교 박해의 대표적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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