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의 역사 태조 때 창건된 조선의 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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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서울의 주산인 북악산 남쪽 기슭에 정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경복궁(사적 제 117호)은 태조 4년(1395)에 창건된 조선의 정궁이다. 태조 이성계는 1392년 조선을 건국한 다음 천도할 것을 결심하고 즉위 3년에 한양 도읍을 결정하여 10월 천도하고 다음해에 경복궁을 이룩하였다. 이 궁은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의 병화로 전소되는 비운을 맞았으며 그 후 왕궁으로서 불길하다는 이유로 273년간이나 중건되지 못하였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전후해 일어났던 재화, 병화로 인해 모두 회진되고 말았으며 국력의 쇠약은 그 후 273년간이나 춘풍추우 속에서 이 궁궐의 황폐화를 막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조선왕조가 거의 종말을 고하게 될 무렵인 고종 2년(1865년)에 흥선대원군이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 궁궐의 규모와 면모를 창건 당시 그대로 재현시키는 역사를 강행해 1868년 준공시켰다. 고종2년에 착수한 경복궁 중건은 4년에 걸쳐 계속된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이 고역을 도맡아 진행시켰는데, 국고가 탕진될 만큼 대공사였다. 이를 충당하기 위하여 조정에서는 관료들과 부자들에게서는 물론, 백성들에게서까지 원납전이라는 새로운 화폐를 주조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결과적으로 통화증발을 야기하는 등 경제의 혼란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해서 완성시킨 경복궁은 궁성의 길이가 1,762간 에 달했으며, 문은 광화문 건춘문, 영추문, 신무문의 사대문이 중건되었다. 궁성 내에 경영한 전각은 합하여 7,225간 있고, 궁성 밖에 경영한 후원에는 489간의 전각이 들어섰다. 태조 창건 당시의 경복궁의 규모는 왕궁으로서는 그리 크지 않은 것이었다. <태조실록>에서는 총 390여 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중건된 경복궁의 규모는 궁성둘레 1,813보, 높이 20 여척, 규모 7,814칸으로 증축되었다. 달라진 점은 왕의 침저인 강녕전 좌우에 연길당, 응지당이 추가되어 5星을 이루고 광화문에서 홍례문 까지의 좌우의 장랑이 담으로 바뀌었다. 또한 동궁에 계조당과 자선당 이외에 시강원과 익위사가 신설되고 청연각 자리에 자경전이 건립되면서 청연각은 부속 누각을 처리되었다. 궁성 동북부와 서북부가 크게 확장되었고 궐내 각사의 배치가 조선 후기의 병화된 관직을 반영하였으며 교태전 뒤에 아미산을 후원으로 꾸몄다. 또 아미산과 향원정 사이에 많은 내전을 건립하고 방지와 관저전, 서현당, 취로정, 충순당이 있던 자리에 큰 연못을 파고 섬 안데 2층의 향원 정을 세웠으며, 향원정 뒤에 건청궁이라는 궁중궁(宮中宮)을 두었다. 그리고 경회루와 간의대 사이에 여러 제전, 문소전 자리에 선원전을 세우고, 신무문 안쪽에 왕실 서고의 하나인 집옥재를 신설하였으며, 신무문 밖에 후원을 만들고 융문당, 융무당, 경농재, 오운각 등을 세웠다. 경복궁의 중창은 단순한 옛궁의 재건이 아닌 새로운 궁궐의 조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임진왜란 이래 본궁을 버려두었다는 명분과 함께 외세들로 인하여 실추된 왕권을 다시 세우려는 흥선 대원군의 꼿꼿한 의지가 서려있는 것 이었다 경복궁은 명종 8년 (1553) 9월 실화로 인해 사정전 북쪽을 모두 소실하였고 이어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의 침입에 앞선 난민들의 방화로 회진돼 버린 후 273년만에 재건된 것이었다. 고종 2년(1865) 흥선대원군이 중 것에 착수하여 고종 5년 (1868)에 창건 당시의 규모로 복원하고 같은 해 7월에 고종이 창덕궁으로부터 이곳으로 왕궁을 옮겼다. 이때의 경복궁 건축물의 총 규모는 9,225간반, 궁장이 1,603간반으로 다시 호화로운 왕궁의 위풍을 되찾게 된 것이다. 역사는 오래이면서도 건축물은 다른 궁궐에 비해 가장 새로운 경복궁이 탄생됐으나 그 명운은 이름처럼 경복하지 못하고 얼마 후에 다시 비운을 겪게 되었다. 재건된 경복궁은 고종 5년 7월부터 1895년 12월까지 27년간 왕궁으로 사용되고 고종의 경운궁 이어(移御)후 1910년의 우리 주권을 상실할 때 까지 왕이 거처하지 않는 빈 궁으로 내려왔다. 고종 32년 (1895년) 민비가 일인 폭도들에게 시해당하는 변을 당하고 이듬해 2월에 고종황재가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하면서 경복궁은 왕궁으로서의 운명이 끝나게 되었다. 당초 경복궁은 높은 돌담으로 둘러져 있었고 경전인 근정전을 중심으로 하여 남족 정면에는 광화문을 세우고 동쪽에는 건춘문, 서쪽에는 영추문, 북쪽에는 신무문이 세워져 있었다. 광화문 안에는 흥례문이 있었고 흥례문 안에는 어구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으며 그 위에 금천교라고 부르는 장려한 석교가 걸려 있었다. 또 그 안에는 근정문이 서 있고 근정 문을 들어서면 넓은 뜰이 펼쳐져 뜰 앞에 2층 단상 중층의 근정전이 장엄하게 솟아 있다. 이 근정전의 뒷문인 사정문을 지나면 그 정면에 사정전이 있고 동쪽에는 만추문, 서쪽에는 천추전이 남향으로 석단 위에 서 있다. 사정전의 뒷문인 향오문으로 나가면 정면에 임금의 침전이었던 강녕전이 있었고 강녕전의 뒤편에는 양의문이 있고 그 안에 교태전이 있었다. 이 교태전은 왕비가 항상 기거하던 전각이며 그 동쪽에 원길헌, 서쪽에 함광헌, 동북쪽에는 건춘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다시 그 뒤편에는 어원(御苑)이 있어 노송을 비롯한 각종 수목이 울창하였고, 연못, 정자, 별궁 등이 푸르른 자연 속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전방의 홍례문 으로부터 이곳까지는 무량이 접속되어 동서의 경역을 구획하고 있었다. 또 홍례문, 근정전, 사정문, 향오문은 제각기 좌우로 무량을 붙여서 이와 접속되어 있었고 지금도 근정문, 사정문, 향오문의 무량은 남아 있다. 이들 전각의 서쪽에는 수정전이 있는데 그 후편에는 방형의 큰 연못이 있으며 그 방도에는 48본의 대석주가 떠받드는 중층누각 경회루가 물위에 떠 있듯이 서있다. 경회루는 태조 때 세웠던 소루를 크게 개조한 것으로 태종 12년(1412년) 4월에 막하루와 함께 중국사신의 연회장으로서 건축한 것이었고 그해 6월 세자가 슨 경회루라는 큰 편액을 걸어 놓았다. 그 후 경회루는 임금이 군신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는 연회장으로 사용되어 왔다. 과거 우리나라의 궁궐은 모두 구릉 위에 세웠었다. 삼국시대의 반월성, 고려시대의 궁궐이 그것인데 경복궁의 오랫동안의 전통을 깨뜨리고 평지에 건축한 것이며 이는 조선왕조 궁전의 한 특색이라 하겠다. 이 평지건축으로 인하여 궁궐의 주위에는 궁장이라고 부르는 돌담을 쌓았고 또 당초에는 화재 방지를 위하여 궁책에서 33미터 이내에는 민가의 건축을 금했다고 한다. 일제는 재건되지 얼마 안되는 경복궁을 곧 헐기 시작하여 근정전, 사정전, 천추전, 만춘전, 교태전, 강녕전, 경회루, 수정전, 자경전, 함화당, 집옥제 등 10여 동만 남기고 모두 4천여 간을 철거시켰다. 그리고 경복궁의 남향 정면을 가로 막는 침략통치의 아성인 총독부 건물을 짓게 했다. 이 바람에 조선왕조 500년 사직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경복궁은 그 웅장하고 화려했던 궁궐모습이 사라지고 전각 정자 등 겨우 10여 채를 헤아리는 오늘의 고궁이 되고 말았다. 또 1917년 11월 16일 창덕궁에 화재가 생겨 옮겨가서 각각 대조전, 희정당으로 부르게 했으며, 광화문은 조선 총독부 건축 때 강제 이전 시켰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강탈당하자 경복궁 내의 200여 동에 달하던 전각은 거의 다 헐리고 경회루와 근정전 등 10여 동만 남았고 일본인들이 근정전 남쪽 정면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음으로서 경복궁의 경관은 완전히 허물어지고 말았다. 경복궁은 그 경내가 150,000평으로 거의 장방형을 이룰 만큼 반듯하여 남쪽에는 정문인 광화문 동쪽엔 건춘문, 서쪽엔 영추문, 북쪽엔 신무문이 있다. 광화문은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을 때 동쪽 건춘문의 북쪽으로 옮겼는데 6.25동란 당시 문루가 타버리고 석축만 남아 있던 것을 1963년 원래의 위치에 복원하였다. 경복궁 내에 있는 아미산과 향원정은 자연적인 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인공적인 건조물을 조화시킨 우리나라 고유의 정취 있는 전형적인 궁중 후원이며, 경회루와 그 연못은 오늘날에도 그 웅장한 규모에 압도당할 정도이다. 처음부터 전문인용
http://home.hanmir.com/~happypalaces/1history.htm 경복궁-궁과 그 역사
경복궁에는 세종16년(1434)에 자동시계를 설치한 보루각(報漏閣)과 세종20년(1438)에 장영실(蔣英實)이 만든 자동물시계를 설치한 흠경각(欽敬閣)을 건축하였고, 세종23년(1441)에 세계 최초로 측우기가 발명되었으며 세종25년(1443)에는 한글창제를 위한 정음청(正音廳)을 설치하여 훈민정음을 반포(1446)하였다. http://gyeongbok.ocp.go.kr/sosok/kbk/home/palace/history.html
문화재청 홈페이지-경복궁 역사 및 변천사
현재 경복궁 내 동북쪽에는 1972년 가을 새로 개관한 국립중앙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으며 향원정이 있는 연못 북쪽에는 건청전이 있었다. 1895년 을미 사변 때 난입한 일본인 불한당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곳이다. 이곳에는 민속박물관(1974년 개관)이 있다. http://home.hanmir.com/~happypalaces/1history.htm 경복궁-궁과 그 역사
경복궁의 복원은 1990년부터 추진되어 강녕전, 교태전, 비현각 등이 건립되었다. 1996년에 조선총독부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흥례문을 복원 (2001)하는 등 경복궁 복원사업이 계속 추진되고 있다 http://gyeongbok.ocp.go.kr/sosok/kbk/home/palace/history.html
나의 의견
경복궁의 역사부분 보고서 및 발표를 마친 전체 소감이다.
경복궁은 초기에 지금보다 약간 큰 규모로 건축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흥선대
원군이 재건을 할 때에는 초기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재건을 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윗글에서도 나오지만 나의 생각도 같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재건하여서 안으로는 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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