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 경복궁의 창건과 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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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경복궁

2> 창건배경

3> 경복궁의 창건과 발전

4> 일제에 의한 훼손과 수난

5> 복원을 위한 노력

본문내용
서울 세종로의 경복궁(景福宮)은 조선 태조 4년(1395년)에 창건된 조선왕조의 정궁이다. 일제시대의 수난을 거치면서 많이 축소되었지만, 아직도 규모나 궐내의 건물들을 보면 자랑스러운 유산임에 틀림없다. 태조 이성계는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후 즉위 3년에 한양에 도읍을 결정하고 그 이듬해 경복궁을 지었다. 경복궁이라는 이름은 경복궁 창건에 깊이 간여한 정도전이 지은 이름으로, ‘시경’ 대아편에 나오는 ‘군자 만년개이경복’(君子 萬年介爾景福, 우리 임금 만년토록 큰 복을 누리소서)라는 말에서 따왔다.
그러나 초기에는 정궁으로는 불완전한 상태였고 그 후 궁내의 건물들이 늘어가다가 세종대왕 대에 이르러 명실상부한 정궁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다가 명종 8년(1553년) 경복궁에 큰 화재가 일어나 근정전만 빼고 편전과 침전 구역의 건물들이 모두 타버렸다. 그러나 중건을 서둘러 이듬해 중건을 마쳤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복궁은 최대의 고난을 겪게 된다. 궁 전체가 모두 불타 없어져버린 것이다. 이 임란 시의 화재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일본군들이 저지른 만행이라는 설과 선조가 도망가면서 백성들이 피난을 가지 못하도록 사대문을 닫아 버려 분노한 백성들이 불태워 버렸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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