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를 통해 본 백제의 역사 한성 백제 박물관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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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이번 현장강의는 한성백제박물관을 관람코스대로 돌면서 문화재 해설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해설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①구석기, 신석기, 청동기가 모두 있던 지역은 드물다. 하지만 한반도는 이런 시기가 모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살기 좋았던 지역이다.
②풍납토성은 한성백제의 왕궁이었다. 나는 그 전부터 위례성이 어딘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알아왔는데 이 사실이 새로웠다.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왕궁이었던 이유는 큰 집 자리와 말머리뼈 12구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고대에 그 정도로 큰 집이 건설되었다면 그것은 백제의 수도가 아니고서 그것은 불가능하고 다른 백제의 유적지와 달리 귀했던 말머리뼈가 12개나 발견되었다는 것은 국가의 큰 제사의식이 행해졌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풍납토성은 토성 중 가장 왕궁으로 손색이 없는 굉장히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또 몽촌토성과 쌍으로 풍납토성은 북성, 몽촌토성은 남성의 형태로, 이는 고구려의 왕성 비슷하다.
③풍납토성 왕궁 건물 중 유일하게 초가집이 있었다. 이 초가집은 발견될 당시 잘 정돈 되어있었기 때문에 동명에게 제사지냈던 사당으로 추리하고 있다. 또 이 집은 기둥 3개가 하나의 세트를 이루어 건물을 지탱했던 것이 특이핟.
④풍납토성에서 발견된 유물 중 하수도관으로 추정되는 것이 있다. 그러나 직경이 너무 짧고 다수가 아니라 네개만 발견되었기 때문에 하수도관이 아닐 수도 있는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만약 하수도관이라면, 고대 도시 건설에서 하수도 시설을 만든 나라는 드물기 때문에 백제 기술이 굉장히 잘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⑤백제 초기 왕릉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석촌동 고분과 같이 돌무지 무덤으로 이는 백제가 고구려에 갈라져 나온 계통임을 알 수 있다.
⑥칠지도는 백제가 일본에게 하사한 것으로 칠지도의 글자 몇부분이 부식되어 이 글자의 해석문제로 말이 많지만, 그 당시 일본은 미개했기 때문에 백제가 일본 왕에게 바친 것이 아니라 하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⑦풍납토성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때 초두가 발견되면서 처음 발견되었지만, 대대적인 발굴 작업이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60년대 이곳에 아파트 개발을 하던 도중, 한 고고학자가 토성 벽면에 토기조각이 많이 박혀있는 것을 보고 비로서 발굴이 이루어졌다.
소 감
교과서에는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순의 역사 발전과정을 항상 다루고 있어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순의 발전이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것을 드물다는 것을 알고, 우리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다. 또 하남시, 몽촌토성, 풍납토성 등 위례성이 어딘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고 알고 있었는데 풍납토성의 왕궁터 발견으로 풍납토성이 위례성이었다고 확실시되는 분위기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위례성이 어딘지는 그 전부터 관심 있어 좀 더 연구해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비밀을 풀게 되어 허무하기도 하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되어 이번 강의가 많이 도움이 된 것 같다. 마지막으로 강의 도중 선생님께서 아이들 중 하나를 지목해 직접 문화재를 설명해보게 하셨는데 내가 연속으로 두 번이나 걸렸다. 이런 우연에 굉장히 놀랐다. 백제 무덤과 칠지도에 대해 직접 설명을 해보았는데 백제 무덤이 고구려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알고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칠지도는 옛날에 책을 통해 본 내용이 떠오르지가 않아 설명하는데 당황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좋은 경험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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