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공주 문화제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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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부여, 공주
문화제를 찾아서
-1500년 시공을 초월한 백제의 고성! 공산성-
중간고사가 끝나고 학교 친구들과 여행을 가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때 마침 한국사과제가 답사를 가고 기행문을 쓰는 과제여서 과제와 여행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친구들과 어디로 가면 좋을지 생각을 해봤는데 마땅한 장소가 나오지 않아 장소를 정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먼 문화제를 찾아가기에는 너무 부담이 되고 너무 가까운 곳에 가면 조금 아쉬울 것 같아 여러 곳을 고민한 끝에 나와 친구들은 백제의 문화제가 많은 공주와 부여로 떠나기로 했다. 친구들과 모여 답사 갈 날을 정하고 이것저것 준비할 것도 정하고 몇몇은 답사 전 어디를 들려야 할지 사전 조사도 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빨리 답사 날이 되기를 설레면서 기다렸다.
10월 28일 금요일
답사 출발 날 금요일 수업이 있던 우리들은 수업이 끝나고 각자 집으로가 모든 준비를 끝내고 6시에 모이기로 했다. 6시에 모인 우리들은 가까운 마트에서 장을 봤다. 먹을 것과 마실 것 고기와 라면 등 을 사서 차에 실었다. 장보는 시간이 길어졌는지 예정보다 출발 시작이 많이 늦어졌다. 8시 30분 즈음 광주를 떠난 우리들은 차를 타고 계속 위로 위로 올라갔다. 이동수단을 렌트카로 해서 다행이지 다른 이동수단을 이용했으면 답사를 가지 못 했을 것 같다. 그렇게 계속 달린 우리들은 11시 쯤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숙소로 잡은 유스호스텔은 너무 조용하고 불빛도 하나도 없어 우리를 당황 시켰지만, 차를 보고 관리자 분이 나오셔서 방으로 안내해 주셨다. 숙소에 집을 풀고 너무 배고픈 우리들은 바로 고기를 구워먹었다. 배가 많이 고팠던지 아이들이 하나같이 너무 잘 먹었다. 배부르게 고기를 먹을 우리는 다시 방으로 들어와 다음날 어디를 갈지 여러 군데 찾아보았다. 무령왕릉, 공주박물관, 정림사지, 공산성, 등이 나왔다. 갈만한 문화유적지를 정하고 우리는 모여서 이야기도 하고 티브이를 보며 잠이 들었다.
10월 29일 토요일
늦게까지 잠을 자며 첫날의 피로를 푼 우리들은 11시 쯤 숙소를 나와 여러 유적지를 찾아갔다. 아침에 추적추적 비가 와서 많이 걱정했지만 오후가 되니 비가 그쳤다. 차를 타고 우리가 가장 먼저 간 곳은 무령왕릉이다.
●무령왕릉
1971년 7월 7일부터 동년 10월 28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발굴됨으로써 그 전모가 드러났다. 송산리(宋山里) 제5, 6호분과 서로 봉토(封土)를 접하고 있다. 분구(墳丘)는 지름 약 20m의 원형(圓形) 플랜을 가지며 널방[墓室]의 바닥면에서 분정(墳頂)까지 7.7m이다. 널방은 연화문전(蓮華文塼)·문자전(文字塼) 등으로 쌓여진 단실묘(單室墓)로 평면 4.2m×2.72m의 크기인데 북으로 축선(軸線)을 둔다. 천장은 아치를 성하고 바닥면으로부터의 최고값은 2.93m이다. 벽면에는 제6호분과 똑같은 모양의 소감(小龕)과 그 아래에 연자창(連子窓) 모양으로 된 것을 북쪽 벽에 1개 동·서벽에 각각 2개를 만들고 각 감내에는 등잔(燈盞)이 들어간다. 출토된 유물은 백제고분으로서 전례없을 정도로 풍부하고 화려하다. 널길[羨道]에서 발견된 한 개의 뿔을 가진 철제(鐵製) 석수(石獸), 청자육이호(靑瓷六耳壺) 동제(銅製)의 발(鉢)·시(匙)·오주전(五銖錢)과 함께 이 분묘의 피장자(被葬者)가 무령왕 부부임을 밝히는 각자석판(刻字石板) 2장이 나왔다. 널방[玄室]에는 청자사이병(靑瓷四耳甁)·청동용기류(靑銅容器類)·철모(鐵)·현금(玄琴) 등의껴묻거리[副葬品]와 금·은의 식금구(飾金具)가 달린 흑칠(黑漆)이 칠해진 목관(木棺)이, 왕의 것은 동쪽에, 왕비의 것은 서쪽에 매치(埋置)되어 있었다. 붕괴된 관 안에는 목침·족좌(足座)·동경(銅鏡)·단룡환두(單龍環頭)의 칼, 울두(斗)와 동제(銅製)의 용기류 화염형관식(火焰形冠飾)·수식(首飾)·이식(耳飾)·과대(帶)·식리(飾履)·팔찌[釧] 등의 꾸미개[裝身具]가 들어 있었다. 또한 왕비의 제3대구치(第三大臼齒)가 출토되었다.
[출처] 무령왕릉 [武寧王陵 ] | 네이버 백과사전
무령왕릉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몇 가지 특징을 알아보았다. 무령왕릉은 입구에서 발견된 왕과 왕후의 지석을 통해 이 무덤의 주인이 무령왕과 그의 아내임을 알 수 있는, 무령왕릉은 삼국시대 무덤들 가운데 최초로 주인과 매장 연도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무덤이다. 또 무덤에서 나온 수많은 부장품은 오늘날 백제의 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고 한다.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은 백제의 문화뿐 아니라 백제와 다른 나라의 교류가 얼마나 활발했는지도 나타내는데 왕과 왕비가 안치된 목관은 일본 규슈지방에서 나는 금송으로 밝혀졌으며 오사카의 다카이야마 고분과 나라의 니자와센즈카 고분에서도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것과 유사한 청동 다리미가 발견되었다.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청자 등 중국 물품들은 당시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과 별로 차이가 없고 또 삼국에서는 유일하고, 전무후무하게도 중국 남조 양나라의 무덤 양식인 전축분(벽돌무덤)이다. 이는 당시 백제가 중국 선진문화에 얼마나 심취해 있었는지 아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로 보아 무령왕대에 국제 교류가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처음 무령왕릉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니 자전거를 이용할 수 있게 되어있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왕릉까지 갈 생각을 하니 너무 신났다. 그런데 자전거는 왕릉매표소까지 밖에 이용할 수 없어 아쉬웠다. 매표소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왕릉처럼 만들어진 박물관이 있었다. 박물관 안에 들어가서 재현한 왕릉 안에 들어가기도 하고 출토된 유물도 구경하고 처음 발굴됐을 때 내부도 보았다. 거기서 중국은 관광객 가이드 아저씨를 만나 아저씨의 자투리 역사 이야기도 들었다. 아저씨가 무령왕이 언제 돌아가셨나 물어 보셨는데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해 굉장히 난처했다. 아저씨가 열심히 설명해 주셨는데 대답을 못해 죄송한 마음도 있고 또 혼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재빨리 박물관을 나왔다. 박물관을 나가 실제 왕릉이 있는 곳으로 쭉 올라가 보았다. 초등학교 때 가본 신라의 무덤과는 다르게 산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올라가는 동안 아래의 경치도 볼 수 있게 되어있어 왕의 무덤은 다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 왕릉에서 가이드 아저씨를 만났는데, 왕릉을 발굴하는데 너무 급하게 발굴하느라 내부가 훼손됐다고 말씀해 주셨다. 또 몇 년 전에는 실제 왕릉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훼손이 심해져서 이제는 출입이 불가능 하다는 말도 해주셨다. 왕릉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듣고 내려오면서 생각을 했다. 이렇게 좋은 문화 유적지가 유적을 발굴할 때 조금 더 일찍 발굴 하려는 마음에 성급하게 발굴 작업으로 훼손됐다는 것이 아쉬웠고, 사람들이 외국에 가서 유럽어디를 갔다 와서 “역사가 살아 숨 쉰다” 하고 말하고, “사원은 앙코르와트가 아니면 사원도 아니다”고 말하는데 우리나라의 좋은 유적지에 대해서는 언급 않는 것이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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