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대의 금주령과 술 문화식 품 영양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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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조선시대 큰 가뭄이 들거나 흉작·기근이 있을 경우 국가에서 술 마시는 것을 금하는 법령으로 이러한 기간에 근신 절제함으로써 하늘의 노여움을 풀고 굶주린 백성들을 위로하며 식량과 비용을 절약할 목적으로 행하여졌다. 1392년 조선개국 직후 흉작으로 인하여 금주령을 내린 것을 비롯하여 여러 대에 걸쳐 빈번하게 시행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자주 금주령을 발동하여 개인의 음주를 금지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조선시대의 술은 곡주로 곡물과 과일에서 얻기 때문이다. 벌꿀이나 용설란 같은 것이 없지는 않지만 대종을 이루는 것은 역시 곡물과 과일이다. 술은 곡물을 ‘낭비’한다. 말하자면 주식량을 낭비하는 것이다. 술은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만, 밥은 먹지 않으면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경제체제가 전적으로 농업 위주였던 조선시대에 곡물의 안정적 확보는 곧 정치-경제 체제의 안정과 연결되는 문제였다. 흉년이 들었을 때 곡물의 낭비는 곧 많은 사람들의 아사를 불러오므로 곡물이 술로 낭비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즉, 조선시대엔 흉년이 되는 해에 금주령이 강하게 발동되었던 것이다. 천재지변이라든지 화재와 같은 재난, 국상 등이 있으면 전국민이 근신하는 의미에서 금주령이 발동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조선에선 500년 동안 금주령이 국가의 기본정책으로 유지됐다. ‘태조실록’ 7년 5월28일조엔 전국 각도에 술을 금하는 영을 거듭 엄하게 내렸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것이 조선시대 최초의 금주령이라 여겨진다. 물론 그 구체적 내용은 미상이다. 태종 때도 금주령이 잇따라 시행됐다. “금주령을 내렸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늙고 병든 사람이 약으로 먹는 것과 시정에서 매매하는 것도 모두 엄하게 금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종 10년 1월19일. 임금이 의정부에 명하였다. ‘금주령을 먼저 세민에게 행하고, 거가에는 행하지 아니하였다. 또 술을 팔아서 생활의 밑천으로 삼는 자도 있으니, 공사연의 음주 이외는 금하지 말라’ 태종 12년 7월17일로 공사의 연음을 금지하였다. 환영과 전송에 백성들이 탁주를 마시는 것과 술을 팔아서 생활하는 자는 금례에 두지 말게 하였다.
2.금주령의 폐단
조선시대 금주령은 대개, 중앙정부가 명령을 내리면 각 지방 행정기관들이 이를 받아 단속하는 방식으로 집행됐다. 금주령은 개국 초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강력하게 시행된 법령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 내용은 천편일률적이어서 금주령의 이유(보통 흉년 가뭄), 금주 기간, 금주령의 적용대상 범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 중 금주령의 적용대상 범위가 주목할 만하다. 다음은 ‘태종실록’ 7년 8월27일조 사헌부의 말이다.
“각사의 병술과 영접·전송,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 다탕을 빙자하여 허비하는 따위의 일은 일절 금지하고, 조반과 길거리에서 술에 취하여 어지럽게 구는 대소 원리를 또한 규찰하게 하되, 다만 늙고 병들어서 약으로 먹는 것과 시정에서 술을 팔아 살아가는 가난한 자는 이 범위에 넣지 않게 하소서.”
늙고 병든 사람이 술을 약으로 마시는 경우, 가난하여 술을 파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경우는 금주령에서 제외되었다. 물론 금주의 범위는 늘 가변적이다. ‘세종실록’ 2년 윤1월23일의 실록 기록에 따르면, 금주령 기간이라도 부모 형제의 환영 전송, 혹은 늙고 병든 사람의 복약, 또 이런 경우에 필요한 술을 매매한 사람은 처벌에서 제외되었고, 오로지 놀기 위하여 마시는 경우, 부모 형제가 아닌 사람을 영접 전송하면서 마시는 것, 또 이들에게 술을 판 경우는 모두 처벌 대상이었다.
금주의 범위는 사회적 상황, 정책 담당자의 성격, 임금의 의지에 따라 유동적이었다. 예컨대 무사들이 활쏘기 연습을 할 때 음주를 허락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중요한 국정 토론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세조실록’ 4년 5월10일, ‘성종’ 9년 5월29일). 음주를 허용하자는 측은 활을 쏠 때 술의 힘을 빌려야 잘 맞는다는 논리를 폈다. 그러나 이 경우 음주 허용과 불가 방침이 반복됐다. 조선시대 금주령은 결론적으로 약을 먹을 때 마시는 술과 혼인·제사 때 마시는 술은 대체로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금주령은 강력했지만 실제 단속에 걸려드는 것은 힘없는 백성들뿐이었다. ‘청주’를 마신 자는 걸려들지 않고, ‘탁주’를 마신 자는 걸려들어 처벌을 받는다 했으니(‘세종실록’ 2년 윤1월23일), 요즘으로 치자면 양주를 마신 사람은 괜찮고 소주를 마신 사람은 걸려든다는 얘기다. “금주령으로 처벌되는 사람은 언제나 가난하고 불쌍한 백성들이고 고대광실에서 호사를 떨며 술을 즐기는 자들은 처벌을 받지 않았다”(‘세종실록’ 8년 2월23일)거나, “가난뱅이는 정말 우연히 탁주 한 모금을 마시다 체포되고, 세력과 돈이 있는 자는 날마다 마셔도 누구도 감히 입을 대지 못했다”(‘세종실록’ 11년 2월25일)는 데서 알 수 있다.
금주령에서 특히 문제 삼았던 것은 소주였다. 조선 건국 이후 체제가 안정되자 술은 점점 고급화되었다. 소주의 소비가 늘어났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소주는 지금과 달리 고급술이었다. 원래 소주와 같은 증류주는 알코올 함량이 높기 때문에 곡식이 많이 소모된다. 세종 15년 이조판서 허조(1369~ 1439)는 “내가 처음 벼슬길에 들어섰을 때는 소주를 보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집집마다 소주가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세종실록’ 15년 3월23일). 허조는 조선 건국 직후부터 관료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니, 건국 초기에는 소주가 드물다가 세종 연간에 와서 소주를 마시는 풍조가 성행하기 시작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성종 21년의 자료에 의하면, 세종 때는 사대부가에서도 드물게 쓰는 것이었으나 성종 때엔 연회에도 모두 소주를 사용하였다고 한다(‘성종실록’ 21년 4월10일). 소주를 마시는 것은 관청에서 시정에 이르기까지 풍습이 되었기에 소주를 만들거나 마시는 것에 대한 금지명령이 내려지기도 했다(‘성종실록’ 22년 2월22일). 그러나 금지령이 지켜지는 것은 한때일 뿐 소주는 이내 다시 음용되었다.
소주의 유행에 ‘신래침학’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신래침학은 과거에 합격하여 처음 관청에 보직을 받아 출근하는 사람에게 고참들이 술과 요리를 요구하는 일종의 입사의식이다. 신참은 고참들에게 값비싼 소주를 바쳐야 했다. ‘중종실록’ 19년 8월1일자에서 남곤은 “민간의 의식이 부족한 것은 술 때문이고, 그 중에서도 소주를 만들기 위해 미곡을 낭비하는 것이 가장 심하며, 소주는 특히 신래를 침학할 때 반드시 요구한다”고 증언하고 있다.
단순히 금주령만으로 술을 금지한 것은 아니었다. 국민을 의식화시키는 방법도 고안되었다. 금연 캠페인이 벌어지듯 음주의 해악을 지적한 책이 제작되고 보급되었다. 세종 15년의 일이다. 세종은 ‘계주윤음’이란 책을 주자소에서 인쇄하여 반포했다(‘세종실록’ 15년 10월28일). 술의 부정적 효과를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그 논리를 잠시 따라가보자. “술은 곡식을 썩히고 재물을 허비한다.” 이 대목은 설명이 필요 없다. “술은 안으로 마음과 의지를 손상시키고 겉으로는 위의를 잃게 한다.” 술을 마시면 평소 지키던 몸가짐을 잃는다는 얘기다. 유교가 국교이던 시기여서 예의 문제도 금주 캠페인의 중요한 요소가 됐다. “술 때문에 부모의 봉양을 버린다.” 술값을 마련하기 위해 부모 봉양을 소홀히 한다는 뜻이다. “남녀의 분별을 문란하게 한다.” “해독이 클 경우 나라를 잃고 집을 패망하게 만든다.” “해독이 작으면 성품을 파괴시키고 생명을 상실하게 한다.” 지나친 음주가 정신건강과 육체적 건강에 위협이 된다는 얘기를 조선시대 세종 때부터 하고 있는 것이다. 세종은 이 책을 서울과 지방의 관청에 보급하여, 족자로 만들어 관청의 벽에 걸어두고 늘 술을 조심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라고 주문했다.
조선은 강력한 통제 사회였지만 금주령은 별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조선 전기는 ‘음주의 시대’라 불릴 만큼 사람들이 술을 많이 마셨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7년 전인 1585년 지평 한응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요즈음 여항에서는 대소귀천을 가릴 것 없이 모두 연회에 절도가 없어 주육이 낭자하고 음악이 시끄러운 것이 태평하여 근심이 없을 때와 같으니, 매우 한심합니다. 술병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일절 금단하소서(‘선조실록’ 18년 4월29일).” 그야말로 로마의 평화가 아닌 조선의 평화였다. ‘대소귀천’ 모두가 술에 빠져 있었다. 현재 한국의 국민 1인당 알코올 소비량이 세계 최고 수준인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 같다.
실록은 대소귀천 운운하지만 술의 최대 소비자가 지배계층인 양반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술은 곧 곡식이었으니 궁핍한 백성들이 술을 마음대로 마실 수는 없었다. 근대 사회 들어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값싼 술이 등장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가난한 사람들도 알코올에 중독될 수가 있었던 것이지 오로지 곡식에만 의존해 살았던 중세의 보통 백성들에게 술은 너무나 값비싼 기호식품이었다.
참고문헌
4.참고문헌
그림속의 음식, 음식속의 역사-사계절 출판사
식생활 문화의 역사-신광출판사
조선왕조실록-www.SILLOK.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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