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대 감상문 레포트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15.06.27 / 2015.06.27
- 3페이지 / hwp (아래아한글2002)
- 평가한 분이 없습니다. (구매금액의 3%지급)
- 800원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1
2
3
추천 연관자료
- 본문내용
-
삼대와 화랑의 후예는 1930년대 작품이다. 1930년대는 식민지 근대화가 많이 진행된 상태이지만 여전히 봉건적 가치관에 집착하고 있는 인물이 두 소설에 등장한다. 삼대의 ‘조의관’과 화랑의 후예의 ‘황진사’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이 둘은 봉건적 질서관에 집착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졌지만, 조의관은 근대 자본주의에 발 빠르게 적응한 인물이고 황진사는 그런 근대에 뒤쳐진 인물이라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지금부터 같으면서도 다른 이 두 인물의 봉건적 가치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2.들어가며
삼대가 쓰여진 1931년은 이미 봉건적 신분제도가 사라진 시기였다. 조의관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족보’는 실질적인 의미를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1930년대 까지도 족보 만들기가 유행했다고 하는데 이는 여전히 봉건적 신분제에 집착하여 문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통 양반 가문이 아니었던 사람들에게 이 시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획득한 경제력으로 족보를 사거나 위조하여 없던 문벌을 꾸밀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도 족보는 문벌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조의관은 수많은 돈을 투자하여 양반가의 족보를 만들고 돈으로 사온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데 온갖 정성을 바치는 것이다.
..........
“족보 한 길에 오십 원씩으로 매었다 하니 그 오십 원씩을 꼭꼭 수봉하면 무엇 하자고 삼, 사천 원이 가외로 들겠습니까”
“삼, 사천 원은 누가 삼, 사천 원 썼다던”
영감은 아들의 말이 옳다고는 생각하였으나 실상 그 삼, 사천 원이란 돈이 족보 박는 데에 직접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 조씨로 무후한 집의 계통을 이어서 일문일족에 끼려 한즉 군식구가 늘면 양반의 진국이 묽어질까 보아 반대를 하는 축들이 많으니까 그 입들을 씻기기 위하여 쓴 것이다.
.......
《삼대》中
염상섭은 이러한 조의관의 행태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조의관이 가장 중시하는 것은 ‘족보’와 ‘사당’이다. 이것들은 봉건적 가치관을 상징하는 것으로, 근대 사회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아직도 봉건 시대의 낡은 신분관과 출세관을 고수하는 인물의 전형으로 조의관을 설정한 것이다. 조의관은 시대의 변화에 발 빠르게 적응하여 마침내 많은 재산을 모은 대지주이며 자산가이지만. 봉건적 관념에 사로잡혀, 족보를 꾸미거나 제사를 지내는 등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애쓴다. 근대에 빠르게 적응하여 약삭빠르게 돈을 모았지만 봉건적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조의관의 모습은 30년대 조선의 가치관의 혼란을 보여준다. 근대와 봉건의 사이에서 근대적 방법으로 돈을 모았지만 그 정신의 지향점으로 근대가 아닌 봉건을 지향 했기에 조의관은 더욱 완고 해지고 봉건적 가치관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같은 30년대 김동리의 화랑의 후예의 황진사는 몰락한 양반의 후예로 주역과 시경을 읊고 문벌과 족보를 들먹이는 전근대적인 인물이다. 구시대의 학문이나 사고방식으로서는 새 시대를 살아갈 수 없기에,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밥동냥이나 돈을 꾸러 다니는 무능력한 인물로 그려진다. 책을 보다 자신의 조상이 신라 때의 화랑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곤 그것을 자랑으로 삼는 봉건적 허세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김동리는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해 가는 양반 계층의 허위성을 황진사를 내세워 비판하는 것이다.
......
- 참고문헌
-
참고문헌
《문학자습서》천재교과서 2009
자료평가
-
아직 평가한 내용이 없습니다.
회원 추천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