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식민지하의 직업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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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우리나라에 근대실업학교가 광무 처음으로 설립된 것은 광무(光武) 3년(1899)에 설립된 상공학교(商工學校)가 된다. 이 상공학교는 상업과와 공업과의 2과로 되어 수업연한을 4년으로 하여 첫 1년은 예과로 하고 다음 3년은 본과로 하였다. 이 상공학교는 광무 8년에 농업과가 증설됨으로써 농공상학교(農工商學校)가 되었다.
이렇게 실업학교로 농공상학교 하나밖에 없었으나, 을사조약 체결 후 일제의 한국인에 대한 실업교육장려책에 따라 실업교육이 각광을 받게 되었다. 일제가 한국인에게 인문교육보다 실업교육을 받도록 정책적으로 유도한 것은 한국인의 의식을 말살시키려는 저의가 있었다. 그리하여 융희 3년(1909)에는 일제의 간섭 하에 실업학교령이 반포되고 뒤이어 많은 실업학교가 설립되었다.
<1.조선 교육령 시대의 직업교육(1911~1922)>
제1기때의 실업학교에는 간이실업학교,농업학교,상업학교,공업학교의 4종이 있었다. 교육목표는 농업,공업,상업등의 실업에 종사할 사람들에게 간단 용이하고 적절한 지식 기능을 학습시키는데 있었다.
간이 실업학교는 구실업보습학교를 변경한 것이었는데,보통학교 실업학교에 부설하도록 권장하였으며 입학자격 수업년한 교육과정의 제한은 없고 누구든지 실업을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이면 입학하여 적절한 직업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농업, 상업, 공업고등학교의 수업년한은 2~3년 이고 보통학교 4년을 졸업한 사람이 입학할수 있었다. 각 학교의 교과목으로는 수신 실업에 관한 과목과 실습, 일본어, 국어, 한문, 수학, 이과 등 과목을 피수로 하고 기타는 지역사정 실제상의 필요에 의하여 적절히 선정할 수 있는 융통성을 두었다.
그리고 학교의 이름을 살펴보자면, 서울의 관립농공상학교 이외에 관립인천실업학교와 공립의 부산실업학교 · 평양농업학교 · 함흥농업학교 · 대구농림학교 · 전주농림학교 · 보천실업학교 · 광주농림학교 · 춘천실업학교 · 군산실업학교 · 정주실업학교 · 제주농림학교 등이있었다.
1차 실업학교의 취지
일제는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나서 그 이듬해인 1911년에 식민지교육정책을 수행하기 위하여 소위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였으나, 거기에서 실업학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즉,「실업학교는 농업 · 상업 · 공업 등 실업에 종사하려는 자에게 필요한 교육을 하는 곳」이라 규정짓고(제20조), 뒤이어「실업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자는 나이 12세 이상으로서 수업연한 4년제의 보통학교를 졸업한 자 또는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로 한다」라고 하였다(제23조). 그리고「간이실업학교의 수업연한 및 입학자격에 관하여는 앞의 2조의 규정에 따르지 않고 조선총독이 정한다.」라고 되어 있다(제24조).
1911년 조선교육령의 공포에 뒤이어 그 해에 보통학교를 비롯한 릴업학교의 규칙이 공포되었는데, 동(同)규칙 제9조에는 다음과 같은 교수상의 주의가 규정되어 있어 일제의 실업교육의 취지가 밝혀져 있다.
「1. 성실 · 신용 · 근검은 실업에 종사하는 자에게 특히 필요한 것이므로 어떠한 교과목에 있어서도 항상 이에 유의하여 교수하여야 한다.
2. 지혜기능은 산업의 개량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사항을 골라 이를 가르치고 또한 지방의 사정에 따라 그 실제에 적절케 하여야 한다.
3. 교수는 이론에 치우치는 일이 없도록 하고 항상 실습과 함께 하여 효과가 있도록 하여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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