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개인적 배경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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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앞에서 이야기 하였듯이 박정희의 아버지가 사회비판적 의식을 가졌으리라고 유추할 수 있는데 이것이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아버지의 비판적 의식은 그가 양만이라는 신분적 지위와 농민이라는 일제하의 농촌이 모두 피폐하였고, 그의 아버지고 자소작 겸농이었다면 빈농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나, 같은 마을에 부농들도 존재하였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빈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 “나의 소년시절” 86쪽
사회경제적 위치에서 초래된 지위불일치 현상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아버지의 성격은 궁핍한 농민의 자식인 박정희가 근대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한데서 드러나며, 아버지의 영향으로 박정희 자신도 기존 사회에 대한 적대적 의식을 강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박정희의 아버지가 동학과 연관이 있거나 최소한 동학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는 점과 그가 관료에 도전하였다가 결국 실패하였다는 사실은, 아버지의 삶의 경험이 박정희로 하여금 개혁적인 의식을 소유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양성철, 앞의 글 37쪽
다음으로는 가족 구성상의 특성을 생각할 수 있다. 박정희는 형제들과는 나이가 차이지는 막내였다. 따라서 막내들이 일반적으로 갖는 현실주의적인 특성을 가졌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부모와 다른 형제들은 전통적 교육을 받았고 농업에 종사하면서 전통적인 의식구조를 가졌을 것이고, 반면에 넷째 형 상희와 박정희는 학교에서 근대적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가족 내에는 상반되는 의식구조가 병행하였으리라고 보여 진다. 가족 내에서의 이중적 정신구조는 박정희로 하여금 전통적인 유교적 사회화를 겪었으면서도, 전통사회를 가난과 연결시켜 전통사회의 의식구조에 반발하는 모순적인 의식구조를 갖게 하는 토대가 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박정희 가족의 빈곤 문제를 생각할 수 있다. 식민지하의 농촌이 극심한 빈곤상태에 있었지만, 근대화된 지역에서 박정희가 접한 교육 경험은 그의 빈곤을 상대화시켰을 것이고, 가난에 대한 증오를 증폭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집권의 변(辯)이나 이후에 행한 언명의 여러 곳에서 유년기의 가난에 관한 내용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박정희, “나의 소년시절”, 월간조선(1984.5) 윤상철, “박정희대통령- 그 인간과 사상”, 정경문화(1979.12)참조
마지막으로 넷째 형 박상희와의 관계를 고려할 수 있다. 형제 중에서 유일하게 근대교육을 수혜 받은 박상희가 진보적 지식인으로서 박정희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그가 해방이후 좌익 사건에 연루되어 생을 마쳤다는 사실에서 박상희는 박정희와 공산주의를 연결시키는 고리가 된다. 박정희로서 여.순 사건은 그의 군 경력과 그 이후 집권과정에서 꾸준한 걸림돌이 되었으므로 박상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가 일제하 좌익 지식인으로서 박정희가 다른 형제보다 그를 제일 따랐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면 박정희는 박상희를 통하여 사회주의적인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보여 진다.
(2) 교육상의 문제
박정희가 근대적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은 두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로는 문자 그대로 전통적인 교육이 아닌 근대화된 교육을 받아 전통적 사고와 유리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박정희가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사실에서 어느 정도 부모를 통하여 전통적인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근대적 교육을 통하여 새로운 사고와 접할 수 있었다고 보여 진다. 둘째로는 그가 받은 교육이 일제의 식민지 교육이라는 점이다. 당시의 식민지 교육이 조선인에 대한 근대적 소양을 심어주기보다는 그들의 지배이념을 강화시키는데 주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유념하여야 한다. 1908년 반포된 ‘사립학교령’과 1906년의 ‘보통학교령’으로 관공립 6년제의 소학교를 4년제 보통학교로 개편하여, 교육의 질의 저하와 조선인에 대한 우민화정책을 추진하였다. 강민길, 『한국근대사』(서울:창작과 비평사 1984), 285쪽
당시에는 그의 고향에서 뿐 아니라, 동시대인 중에서도 근대적 교육을 받은 사람이 적었기 때문에, 박정희는 동시대인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근대 지향적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식민지 교육정책이 황국신민화를 강조하고 민족교육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어가던 시기에서 그가 받은 교육은 일본제국주의 지향의 내용이었다는 것은 그의 사고 구조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당시에 민족교육은 전통 서당이나 노동야학이 중심일 수밖에 없었다는 견해가 많다. 강동진 “일본지배하의 노동야학” 「역사학보46집」(1970) 참조
비록 박정희의 전기들에서 그의 학업능력을 확대 해석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범학교나 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할 수 있었다는 것은 박정희가 모범생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가 입학한 사범학교도 명목상으로는 일제하 교육체제에서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의 교육기회 부여라고 하였지만, 궁극적으로는 동화주의 교육추진자를 양성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는 것을 주목하여야 한다. 당시 사범학교가 수업료나 식비, 그리고 기숙사비까지 제공하는 등 많은 특혜를 제공함으로써 경쟁이 치열하였고, 식민지교육을 충실히 할 수 있는 교사를 뽑았다는 점에서도 박정희가 일본의 식민지교육에 충실하였으리라고 판단된다. 물론 많은 전기들에서는 박정희가 일제에 동화되지 않고 민족의식을 학교생활에서도 보였다고 주장한다. 박동성, 심고령, 앞의 글, 49쪽 : 정재경, 앞의 글, 28쪽. 하지만 그런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범학교 입학과 발령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교사 생활을 마치고 군국주의의 정수라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에 입학하고 재학 중에는 탁월한 성적을 거두었다는 것을 보아도 그러한 해석이 설득력이 있다. 사관하교는 일반 국민이라도 입학자격이 까다로웠고, 만주군관학교는 일제에 의한 대륙침략의 첨병으로서 주된 적을 독립운동가로 보고 있으며, 실제로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은 일본의 관동군예하에서 독립운동가에 대한 정보공작을 주로 맡았다. 박정희는 이러한 분위기의 학교에서 수석을 하였다는 것이다.
(3) 직업과 경력상의 문제
박정희는 3년에 걸친 보통학교 교사생활과 2년에 걸친 관동군 장교 생활과 해방조국에서의 약 14년에 걸틴 한국군 장교생활을 마치고 한국군에서의 그의 군인으로서의 근무기간은 확실하지가 않다. 우선 귀국시기에 대하여 기록이 엇갈리고 있고, 육사입학시기와 졸업시기도 엇갈린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동시에 여.순사건으로 공백기가 있었고 5.16 이전까지로 보아야 하느냐 아니면 예편시기까지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가 있다. 그러나 일제의 관동군 시절까지 합하면 20년 정도의 군경력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정치가로 변신하였다. 교사생활은 3년은 사범학교 졸업새의 의무복무였다는 점과 그 시기가 길지 않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할 수 있지만 그가 교사에서 군인으로서의 변신과정에 대해서는 유의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직업적 변신의 원인에 대해서는 이론(理論)이 많다. 그러나 일제의 교육제도에 대한 반발 혹은 상급자인 일본인 교육관계자들과의 불화에서 기인하였다는 설명은 박정희가 보다 일본적이랄 수 있는 일제의 직업 군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납득하기가 어렵다. 또한 해방 후 조국의 군대를 지휘하기 위한 준비라는 설명에도 문제가 있다. 그것은 귀국 후 해방조국의 군에 즉각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관동군 소속으로 군경험을 생각할 수 있다. 앞에서 이야기하였듯이 관동군은 주로 중국인을 포함한 한국인들의 반일투쟁에 대항하여 활동을 하였다. 박정희 자신과 대부분의 전기에서는 이 부부능ㄹ 반민족적이 아니고 반공산주의적인 임무수행이었다고 정당화시키고 있다. 박동성.심고령, 앞의 글,61-66쪽. 그렇지 않은 경우 다른 전기들에서는 이시기에 대한 언급을 대체적으로 생략하고 있다.
그러나 박정희가 자발적으로 가담했는지의 여부를 떠나서 1948년의 여.순사건에 분명히 연관이 되어 있고, 일시적 착각이라고 하더라도 공산주의와 관계를 가졌다는 점에서 관동군 시절의 활동을 반공주의로서 설명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해방 전후의 정치상황에서 박정희가 겪은 중요한 문제는 여.순사건에 관련된 일이다. 그가 군부 내 공산주의 활동에 연루가 되었다는 사실은 가담정도가 어떤 수준이었던 간에 공산주의 사상과 접촉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전향을 하였고 한국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면이 되어 군에 복귀할 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끊임없이 사상적 경력으로 불이익을 받으면서도 장군까지 승진하였다는 점과 집권 이후의 정치적 지향성을 고려한다면 공산주의 사상에 깊숙이 연관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이후 군 경력에서는 그가 여.순 사건의 여파로 진급이나 보직에서 불이익을 받았다는 점과 그의 전과가 포병이었지만 문관시절 정보 분야에서 일을 하였고, 종전 후 6개월간 미국에 유학 갔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특히 그가 군대 내에서 받은 신사상의 불이익은 학교경력에서의 화려함에 비추어 군과 사회에 대한 강한 불만의 원인이 되었고, 이것이 쿠데타를 일으킨 개인적인 동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정보 분야에서의 경험과 더불어서 한직으로 전전하였던 사실이 5.16을 도모하는데 있어서 동조세력을 규합하고 계획을 수립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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