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아래의 독일인을 위한 격려 - 피히테의 독일 국민에게 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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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나폴레옹 아래의 독일인을 위한 격려’
피히테의 『독일 국민에게 고함』
1. 서론
철학자들 중에는 자신의 지적 능력을 신봉하고 다른 이전의, 혹은 동시대의 지식인들을 비판하기를 즐기는 자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쇼펜하우어는 동시대 철학자인 헤겔이 칸트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계승했다는 평가를 인정하지 않으며 그의 논평에서 ‘칸트에서부터 나에 이르기까지 그 기간 동안에는 어떤 다른 철학도 있을 수 없다. 대학에서 자리 잡은 협잡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또한 ‘나보다 어리석은 동시대인들에게 더 많이 둘러싸인 사람이 있다면 한번 만나 보고 싶다’라는 아주 공격적이고 자기도취적인 발언을 한 바도 있다. 사실 대학 교수시절 헤겔의 수업은 쇼펜하우어의 수업에 몇 배에 달하는 인기가 있었고 쇼팬하우어는 교직에서 물러났지만 말이다. 이처럼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대단한 철학자들은 자신의 언행뿐만 아니라 자신의 저서, 혹은 논평에도 그만큼 대담한 문구를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그런데 독일관념론과 관련된 철학자들의 저서들을 살펴보던 중 아주 대담한 제목의 저서를 발견했다. 요한 고트리프 피히테의 저서 『독일 국민에게 고함』였다. 자신 이전의 철학과 도덕관념 전반에 의문을 던지고 비판한 니체도, 철학사에 악동과도 같은 인물이었던 비트겐슈타인도 이렇게 자신의 저서에 대상 독자로 삼은 계층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제목을 지은 적은 없다. 유아독존의 자세를 일관하는 철학자들에 대한 관심은 이 제목을 지나치지 못했고 과연 18세기 독일을 살아간 철학자 피히테가 독일 국민을 직접적으로 대상으로 삼으며 주장하고 깨우치려 한 바가 무엇인지, 이 저서의 제목이 주는 첫인상과 같이 대담하고 당돌하게 내용을 전개해 나갈지 알아보려했다. 그리고 그의 당대 독일인들을 향한 충고가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그 충고가 현대사회에까지 유효한지 고민해볼 것이다.
2. 피히테의 생에
그의 저서를 논하기에 앞서 그의 생에를 통해 그가 이러한 주장을 펼친 시대적, 환경적 배경을 알 필요가 있다.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Johann Gottlieb Fichte 1762년 5월 19일 - 1814년 1월 27일)는 작센의 작은 마을 람메나우에서 리본 직공의 8남매 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780년에 예나 대학 신학부에 입학했고 이어서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겨 철학과 법률을 배웠다. 많은 철학자들이 귀족 계충, 혹은 부유한 가정배경을 가지고 있던 것에 비해 피히테의 대학생활은 특히 가난했으며 가정형편을 위해 학업도 단속적으로 이어나갔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도 가정교사생활을 하며 각지를 전전하던 중 《종교와 이신론(理神論)에 관한 아포리즘》(1790)을 저술하였는데 이를 통해 피히테가 스피노자의 결정론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후 다시 라이프치히로 돌아와 1791년 칸트 철학을 접하고 크게 감명하게 되었으며 이후 자신의 철학의 전개방향을 설정하게 되었다. 그 후 쾨니히스베르크로 칸트를 찾아가 그의 주선 하에 《모든 계시의 비판 시도》(1792)를 익명으로 출판하였는데, 사람들은 처음에 이를 칸트의 저서로 알고 있었으나, 칸트 자신의 정정과 천거에 의해 피히테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사실 피히테는 가정 교사 자리마저도 없어서 칸트에게 돈을 꾸어 달라는 편지를 했으나 칸트는 대신 피히테의 논문을 출판하는 길을 찾아 준 것이다. 이후1794년 예나 대학에 부임하면서 그는 학자로서의 기반을 굳혔다. 1794년에는 『지식학(Die Wissenschaftslehre)의 계념에 대하여』, 『학자의 사명』, 1795년에는 그의 대표적인 주저 『전지식학의 기초』, 1796년에는 『자연법의 기초』등을 발표하여 철학자로서의 위치와 명성을 쌓았다. 그러나 1798년 철학 잡지에 포르베르크의 논문에 서문으로 발표한 『신의 세계지배에 대한 우리들의 신앙 근거에 관하여』 라는 논문이 무신론이라는 의혹을 받아, 큰 논쟁을 발생시켰으며, 결국 1799년 예나대학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 후 베를린에서 낭만파 사람들과 교류하였고, 사상적으로는 신비적·종교적 색채를 더해 갔으나, 동시에 시국 정치문제에도 활발한 발언을 시도하였다. 이 시절에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패한 당시 독일 국민들에게 행한 강연이 바로 『독일 국민에게 고함』(Reden an die Deutsche Nation, 1807년 ∼ 1808년)이었다. 1810년, 프러시아 정부에 의해 베를린 대학이 신설되자, 피히테는 대학의 철학부장으로 임명되었고, 다시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피히테는 타협하지 않는 그의 성격으로 인해 총장직 수행에 여러 가지 문제를 겪었고 결국 1812년 자진 사퇴했다. 1813년, 프러시아, 러시아, 오스트리아 동맹군이 나폴레옹에게 선전 포고를 하자 피히테는 직접 설교사로 종군하려고 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그는 부인과 함께 후방에서 부상병 치료에 종사했다. 그러나 부상병 치료중 아내가 감염된 발진디푸스가 옮아 아내는 간신히 위기를 넘겼으나, 피히테는 1814년 1월27일, 동맹군의 파리 입성을 알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은 칸트에게 받은 영향으로 시작된 철학자의 삶이었으며 프랑스 혁명을 기만하고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의 야망이 유럽을 잠식해 나가는 것에 저항하며 마감한 격정적이라 할 수 있는 삶이었다.
3. 독일 국민에게 고함(Reden an die Deutsche Nation)
『독일 국민에게 고함』은 예나대학에서 물러난 후 나폴레옹의 야망에 좌절한 독일 국민들을 대상으로 피히테가 펼친 강연으로 1807년 6월 14일 프러시아의 빌헬름 3세와 나폴레옹간의 강화조약으로 빠르게 몰락하며 프랑스에 종속되어가던 시기의 독일 국민들에게 이 난국을 벗어날 길을 제안한 것이었다. 번역된 제목은 ‘독일 국민’이지만 당시 독일은 오스트리아가 지배권을 가진 여러 왕후국들의 국가연합이었으며 저서 내에는 ‘독일의 나라들’이라는 복수 표현이 등장한다. 또한 피히테는 독일 민족을 다른 민족과 구분되는 가장 큰 특징은 사는 지역이나 다른 요인이 아닌 언어라고 보았으며 언어의 성질이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용하는 사람들의 발전과 사유에 영향을 미치는 만큼 당사자들에게 정신적 공통점을 부여한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의 이성은 언어를 통해 전개되며 언어가 인간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언어에 의해 형성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언어를 민족의 특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보았다. 즉 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만이 독일민족을 자칭할 수 있고 ‘독일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주장은 적잖이 민족주의적 성격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전체 강의의 구성을 보면 서론, 독일 국민 교육론, 독일 국민 교육을 맡아야 할 독일 국민에 대한 계몽, 결론으로 이루어져있다. 그 가운데 검열 당국에 의해 독일 국민에 대한 계몽 중 일부였던 제13강은 강연 원고가 분실되었다. 이 강연의 요점은 독일 국민이 나폴레옹 군대에 패하고 이후 지속적으로 몰락하며 재기하기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된 원인이 독일 국민의 이기심에 있으며 이를 새로운 교육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피히테는 기존의 교육이 사람을 선하게 인도하지도, 타락시키지도 못할 만큼 영향력이 없으며 선해지거나 타락한 사람은 모두 각자의 성향에 의해 그리 되었을 뿐이라고 보았다. 피히테의 새로운 교육은 주체적인 정신 활동을 중요시하며 인간의 마음에 확고하고 예외 없는 선한 의지 형성을 목표로 하여 기존의 교육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의 교육은 감각과 직관을 밝히는 교육과 신체적 능력을 기르는 교육을 병행하며 이를 토대로 독일 국민으로서 알아야 할 시민적 요소와 종교적 요소들을 교육한다. 그는 출생계급과 개인의 소질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고 보았기에 하층민 가족의 자녀 역시 가장 심오한 형이상학적 교육을 이수하는데 큰 지장이 없을 것이라 보았다. 이러한 내용에서 피히테는 교양계급에 국한되어있던 기존의 독일 교육을 벗어나 국민 전체가 받을 수 있는 교육을 만들어야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로 인해 독일의 민족의식이 각성되면, 독일 국민은 다시 독립하여 세계사에 영향을 떨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4. 견해
역자 황문수는 이 책을 옮기며 느낀 것들을 소감문으로 남겼다. 그는 자기 민족과 그 민족의 고유한 언어, 그리고 발전과 개선에 대한 믿음이 참된 조국애라는 것과 국적 있는 교육, 또는 주체적인 교육의 바람직한 방향을 알 수 있으며 피히테가 말하는 민족적 주체성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아직 의미를 가지고 교육을 통해 민족을 부흥시킬 수 있다는 믿음에서 감동마저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역자의 소감에 나는 크게 동의할 수 없다. 특정 계급에 치우치지 않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정신과 인성 중심의 교육을 강조하는 점은 일정부분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피히테가 말하는 교육은 철저하게 독일의 민족적인 부분에 집중한 것이고 그가 말한 이기성을 극복한 독일 국민의 모습이 과연 독일 외의 나라에서도 선한 것으로 통할 수 있을 모습일지는 의심이 된다. 또한 독일 국민은 선량한 인간으로서만 존속 가능하고 타락할 시 외국과 섞인다는 그의 표현은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함께 자신이 정한 기준 속에서 독일인이 외국인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그의 관점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실제로 그의 철학 중 독일인의 순수성 보전을 역설한 부분은 교묘하게 선택 및 개조되어 나치의 지배 이념에 이용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언어를 민족 구분의 기준으로 보았는데 이에 대해서도 의심의 여지가 있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사용되는 언어들은 단순히 편의를 위해 합의로써 정한 표현들을 공유한 것일 뿐 세상의 어느 본질도 이야기하지 못하며 이는 그저 일종의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에서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민족의 조건으로 묶는 것은 그 판단의 근거가 되기 힘들 것이다. 또한 애당초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상당히 폐쇄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것일 수 있다. 전통을 보존하고 그로부터 지혜와 의미, 새로운 창조성을 찾는 것과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뭉치는 것은 분명한 차이를 가진다. 이기성의 극복을 꾀하는 것은 좋지만 그 이기성이 현대적 의미의 이기성인지 의심이 갈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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