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령공주 영화감상문 환경의 역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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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령공주 영화감상문
(환경의 역습)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원령공주를 보고 너무나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의 우리 상황과 문제를 너무나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세계와 원령공주의 내용에는 지금 얘기하고자 하는 환경 문제 외에도 더 많은 메시지가 들어있지만 작품 위주의 분석 보다는 현실의 환경문제와 관련지어 생각해 보면 더욱 좋을 것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환경의 역습
영화를 보고 얼마 후 무심코 텔레비전을 보던 중 환경의 역습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환경의 역습 이라... 내용은 우리의 삶을 바꿔놓은 도시화와 같은 시대의 혁신적인 변화가 인간에게 어떤 악영향을 끼치는지에 관한 내용이었다. 여기서 환경이라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을 얘기 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곧 자연을 얘기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그동안 인간의 주거를 위하여 나무를 베어내고 자연위에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거대한 아파트와 빌딩을 세웠다. 곧 그것이 우리에게 환경의 역습이라는 어마 어마한 재앙을 줄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마치 영화에서 재앙신이 인간의 마을을 향해 돌진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현재 원인을 알 수 없는 수많은 피부병과 천식과 같은 기관지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영화에서 아시타카가 정체모를 재앙신에게 저주를 받아 그 이유를 찾아 떠나는 것처럼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고 묻지 않았다. 그러나 밝혀진 결론은 인간이 파괴한 자연이었다. 환경의 역습이 시작된 것이다.
자연을 탓하지는 마라.
이 작품에서 자연은 결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각각의 나름대로 욕망을 가진 캐릭터들을 자연을 대표하는 시시신은 때로는 부드럽게 감싸주기도 하고 때로는 강력하게 대응하기도 한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동화를 아는가?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자연을 상징할 수 도 있다. 자연은 항상 그 자리에서 가만히 있다. 결국 인간의 욕망이 자연을 망가뜨리고 또 그 안에서 상처 받는 것이다. 자연은 주기만 할 뿐인데 우리가 망가뜨린 자연으로 하여금 현재 우리가 겪는 고통을 가지고 자연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영화에서는 환경의 변화에 대한 환경의 역습이 인간에게 아주 빠르고 직접적인 타격을 입히는 것으로 보여 지지만 실제 자연 환경은 그렇게 빠르게 인간에게 해를 입히지는 않는다. 아주 느리게 그리고 조금씩 인간에게 그 결과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오래전에 사용이 금지된 농약의 성분이 80년대 이후 출생자들의 체내지방에서 검출되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이것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인간의 편의를 위해 환경을 변화시켰고 파괴시켰던 일을 시작했던 사람들은 환경의 변화가 미치는 영향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물론 그들은 그것을 아는 것 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강력한 여성상을 나타내는 에보시가 마을의 존립을 걸고 자연을 자신의 영역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결과는 그 이후다. 영화에서도 그 이후의 일들은 그들의 욕망에 맞게만 생각한다. 그 이상도 이하도 그들은 생각하지 못한다. 아니 생각할 수 도 없었을 것이다. 인식의 부족이다. 지금 80년 이후의 출생자들의 몸에서 나온 지방에 함유된 유해한 성분이 그 지방을 먹고 자라나며 태어나서 그 지방을 성분으로 한 모유를 먹을 때 태아들이 겪을 수 있는 고통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의 선조들이 자연을 발전을 위한 영원히 변하지 않고 끝이 없는 무한한 재료로써만 생각했을 때 우리의 후세들이 겪을 수 있는 고통인 것이다.
공존인가 대립인가?(발전과 보존의 문제)
영화에서 우리는 철을 만드는 인간의 거주지와 신들이 사는 숲 이라는 대립되는 공간적인 배경을 볼 수 있다. 그곳에서 철은 갈등의 이유가 되는 metaphor 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철은 인간의 욕망을 해소해주는 것이지만 인간의 철을 이용하여 욕망(인간의 문명사)을 채워가는 인간의 방법이 공존을 대립으로 만든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인간은 현대에 발생한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를 위해서도 발전을 할 수밖에 없고 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는 발전을 위해 자연을 이용한다. 여태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자연은 무한하지 않고 유한하다. 또한 인간의 발전을 하고자 하는 욕망 즉, 좀더 나은 삶을 바라는 것의 속도는 우리가 자연을 이용하고 나서 그 이용한 자연이 보충되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다. 고맙게도 자연은 스스로 인간이 이용한 부분을 보충하는 능력을 지녔다. 그러나 인간은 그 보충의 부분을 고려하지 않는다. 또한 이용의 한계 역시 고려하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인간이 계속 빠르게 베어버린 나무를 성성이들이 다시 심는 것 그리고 그러나 인간의 자연 이용 속도와 그것을 고려하지 않는 태도에 화가 난 성성이들이 인간을 먹겠다고 한 부분이 이러한 것들을 나타낸다고 본다. 지금까지 오는 동안 인간들은 그 부분을 고려할 만큼 여유가 없었다. 허나 이제 우리는 여유를 가져야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환경의 역습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인간들은 하나둘씩 자연의 보존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경고의 메시지가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크게 보면 성층권의 오존층 파괴와 지구 온난화 생물종의 감소등이 인간의 생명에 직접 영향을 주진 않지만 서서히 목을 조여오는 것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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