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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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독후감]
‘죽음’ 그 이름만으로도 공포스러우면서도 한번 가까이 다가서서 알고 싶은 신비한 개념이다. 사후세계, 종교, 영혼 등등 신비로운 모든 개념들이 이 죽음이라는 베일에서 비롯되었다.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많지만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줄 누군가는 없는 미지의 세계에 우리는 공포와 신비스러움을 느끼고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막연하게 알고 있는 죽음이란, 신체가, 더 구체적으로 하면 심장이 그 명을 다하여 기능을 멈추었을 때 의학적으로 ‘사망 선고’를 하여 죽음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심장이 뛰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생물학적으로 심장이 기능을 하는 모든 사람은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요즘 사회는 은유적으로 ‘좀비 사회’로 표현되고 있다. 좀비의 사전적 정의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시체’라서 썩어 있는 존재다. 일반 인간처럼 숨을 쉬고 거리를 걷고 생각도 하고 사랑도 하고 인간 활동을 다 하지만 결국엔 시체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를 둘러보면 어디 분야에서도 ‘진정성’이라는 것은 찾아볼 수도 없게 텅텅 비어 있는 것 같다. 학교 가는 지하철 안에만 앉아있어도 이 같은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지하철을 탔다는 것은 방향과 목적이 있기 때문일 텐데 그 누구도 표정에 생기라고는 없다. 자신을 실은 지하철이 어디로 가는지, 언제 도착할지를 망각하고 무표정으로 죽어있는 무생물 핸드폰만 초점 없이 바라보고 있다. 아니면 정말 시체처럼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이리저리 고개를 흔들며 잠을 잔다. 가만 보고 있으면 2호선 등굣길 사람이 바글바글 들 끓어도 살아있는 사람은 없는 듯이 보인다. 길 걸어가는 누군가를 붙잡고 ‘당신은 지금 살아있다고 느끼십니까?’ 라고 물었을 때 ‘네, 저는 살아있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이 있을까. 길을 걷고, 수업도 듣고, 일도 하고, 친구도 사귀고 사랑도 하지만 좀비 처럼 생물학적으로 심장만 뛰고 있는 현실은 ‘살아있다’ 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살아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저자는 죽음을 이야기 하면서 그로부터 살아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몸이 나를 지배하는 죽음의 질서가 죽고 내가 몸을 지배하는 생명의 질서로 재탄생 해야 한다.’
누군가 ‘나’가 누구냐고 물어봤을 때 거울 안에 비친 나를 보여주기에는 어딘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감각기관으로 경험할 수 없는 무언가의 나가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연한 생각만 있을 뿐 그 무언가의 나가 무엇인지 살필 기회가 없어 그저 몸을 가꾸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무언가의 나를 찾기 위해 고민하는 것은 끝없는 미로를 헤매는 것만큼 시간낭비야. 그 시간에 보여지는 나를 더 가꾸자.’ 결국 ‘나’는 어디 대학교 무슨 학과에 다니는, 어디에 살고 키가 얼마인, 치킨을 좋아하고 당근을 싫어하는 대학생인 것으로 남는다. 가시적이고 본능적이고 욕망적인 ‘몸적 자아’가 이끄는 대로 마음의 사유와 행위를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있기 위해서는 ‘영적 자아’를 찾아야 한다. 영적 자아는 경험으로 아는 ‘나’가 아니라 선험적인 존재의 나를 말한다. 경험으로 뭉친 몸이 나를 지배하기 전에 내가 욕망에 찬 몸을 지배해야 한다. 영적 자아를 ‘나’와 동일시 하는 노력이 죽음의 질서에서 벗어나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 행복에 있어서도 몸적 자아와 영적 자아는 차이를 보인다.
우리는 언제 행복하다고 하나? 원하는 목표를 이뤘을 때, 그것이 사랑이든 일이든 학교든 돈이든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얻었을 때 행복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그 행복이 목표를 이루고 난 후 지금까지 같은 크기로 유지되고 있는지. 분명 목표를 이루었을 그 당시와 다르게 행복의 정도는 줄었을 것이다. 또는 지금 또 다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반대로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수도 있다. 이렇듯 우리가 행복이라고 생각한 것들은 일시적이다. 순간적인 행복을 느끼기 위해 끊임없이 전진하고 끝없는 레이스를 달리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행복의 짝퉁인 ‘행복감’이라 부르고 ‘몸적 자아’의 욕망을 해소시키는 찰나의 무언가로 표현하고 있다. 몸의 욕망을 나의 행복으로 동일화시켜 몸의 이기적인 쾌락, 생존, 성공을 끊임없이 갈구한다. 그리고 이것이 충족되면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결국 행복감은 내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 대상이 나로 하여금 행복감을 느끼도록 하여 수동적으로 그 행복감을 받아드리는 것. 다른 대상에 의존적으로 행복감을 느끼는 ‘나’는 사실 ‘몸’이다. 따라서 나는 죽고 없는 상황이다. 반복적으로 생겨나는 새로운 행복감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모습은 지하철에 몸을 싣고 돈을 위해, 학점을 위해, 취직을 위해 좀비들의 모습과 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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