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테 콜비츠의 작품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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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테 콜비츠의 작품 감상
“이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인, 거짓말, 부패, 왜곡
즉 모든 악마적인 것들에 이제는 질려버렸다.
나는 예술가로서 이 모든 것을 감각하고, 감동하고,
밖으로 표출할 권리를 가질 뿐이다.”
-케테 콜비츠-
케테 콜비츠는 독일의 미술가이다. 콜비츠의 작품들을 보면, 대부분이 어두운 톤으로 그려져 있다. 많은 작품에 고통과 절망이 드러나 있으며, 거의 무채색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른쪽의 그림은 콜비츠의 <직조공들의 봉기>라는 6편의 연작 중 첫 번째 작품인 <빈곤>이다. 작품은 매우 어두침침한 분위기에 있다. 침대에 아기가 누워있고, 그 옆에 부모로 보이는 사람이 머리를 감싸쥐고 울고 있다. 그 뒤에는 실을 잣는 물레와 베틀이 있음으로써 이 사람이 직조공이라는 것을 보이고 있다. 부모의 태도로 보아 아기가 죽었거나 죽음에 임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친 터치는 이들이 가난하고 힘겨운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 번째 작품은 <죽음>으로 아기의 죽음을, 세 번째는 <회의>로 직조공들이 봉기를 논의하는 회의를, 네 번째는 <행진>으로 직조공들이 무기를 들고 나서는 장면을, 다섯 번째는 <폭동>으로 노동자들이 자본가의 집에 돌을 던지고 항의하지만 침묵만이 계속되는 자본가의 대저택을, 마지막은 <결말>로 실패한 봉기와 어두운 실내에 시체가 널부러져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 연작은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독일의 슐레지엔이라는 곳에서 자본가들이 직조공들을 착취하고 있었다. 자본가들이 모든 이익을 챙기고, 직조공들은 그야말로 하루하루 목숨을 간신히 이어가고 있던 삶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쌓이고 쌓인 울분이 터져서 노동자들은 회의를 거쳐 1844년에 봉기했다. 그들은 무기를 들고 자본가들에게 빵을 달라고 요구하며 나아갔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침묵과 총알뿐이었다. 결국 11명의 사망자,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낸 후에 봉기는 실패했고 그들은 과거의 삶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개인과제의 주제로 케테 콜비츠와 그녀의 작품을 선정한 이유는 바로 고통에 대한 묘사 때문이다. 사실 생명을 표현한 미술 작품이라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즐겁거나 행복해하는 사람들, 싱싱하게 나무와 풀이 자란 자연, 자유롭게 뛰노는 동물 등을 상상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만으로는 생명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살아있다는 사실을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때는 극도로 행복할 때와 극도로 고통스러울 때이다. 이 둘중 하나만 있어서는 완벽하다고 할 수 없다. 주변에서 긍정적인 생명의 작품은 많이 보았기에 부정적인 생명의 작품을 보기로 한 것이고, 많이 유명하진 않지만 사회에 대한 비판을 함께 담은 케테 콜비츠와 그녀의 작품을 보기로 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직조공들의 봉기>는 연작으로, 노동자들의 자본가의 압제에 시달리고, 벗어나려 하지만 결국 실패하는, 당대의 어두운 사회 현실을 나타내면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통해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기에 택했다.
콜비츠는 1867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콜비츠가 태어났을 때는 한창 산업화의 문제가 부각되고,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칼 마르크스가 사회주의를 주장하고 나선 때였다. 콜비츠의 외조부는 목사직을 하다가 프러시아는 너무 보수적이라서 사임하고 자유와 정의를 지향하는 교회를 세워서 활동하였고, 아버지는 역시 목사를 하다가 그만두고 건축 일을 했다. 남편인 칼 콜비츠는 베를린에서 의사가 되었는데, 빈민가에 살면서 빈민의 치료를 주로 했다. 이렇듯 온 가족이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일을 한 만큼, 콜비츠도 진보적인 정의, 윤리관을 갖게 되었다. 특히 남편과 함께 빈민가에서 살면서 공장 노동자들의 고통스런 삶을 직접 보게 되고, 그들을 작품으로 표현하기로 마음먹었다.
20세기 초반부터 그녀의 작품이 세계 각지로 퍼져나간 이래 그녀에 대한 논평은 아직도 멈춰지지 않고 있다. ‘콜비츠야말로 위대한 판화가다’, ‘여성으로서는 유일한 신예술 판화가다’, ‘사회민주주의 선전가다’, ‘비탄과 고난을 형상화한 화가다’, ‘종교적 예술가의 한 사람이다’ 등 모두 제 나름대로 취향과 감각과 지성을 동원하여 그녀를 논평하고 있으나, 누구나 공통적으로 공감하는 것은 ‘사람들은 그녀의 작품을 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녀의 예술세계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간에 단 한 번이라도 콜비츠의 작품을 본 사람이라면, 그녀의 이름만 들어도 그녀의 그림을 다시 보는 것처럼 눈앞에 생생히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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