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문] 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 - 운명,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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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을 읽고
이번 사회학개론 강의에서 마지막 과제인 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이라는 책을 보고 창가학회라는 것은 어떤 곳이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책을 읽기 전 창가학회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 찾아보았다. 창가학회란 원래 일본의 승려 니치렌의 불법을 신앙의 근간으로 한다. 1928년 종단의 한 사람이었던 마키구치 쓰네사부로가 니치렌의 불법을 접하고 그의 교육이론의 근저가 되는 인격가치의 강조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을 깨닫는다. 그 사상의 근본은 니치렌이 설교한 색심불이의 생명철학에서 출발하여, 궁극적으로 생명의 존엄이라는 입장에서 민중을 구제하고 행복을 추구하며 웅대한 문화를 건설하는 것이다. 1970년대 중반에는 회원 수780만 세대를 거느리고 있는 일본 최대의 종교가 되었고, 현재는 1,000만 세대로 집계되고 있다고 한다. 창가학회는 현재 생명존엄을 바탕으로 평화 문화 교육운동과 사회공헌, 환경보호활동 등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는 큰 종교단체이다. 책을 읽으면서 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이 무슨 관련이 있는지 궁금하였다. 재일한국인이라는 단어는 ‘재일제주인과 삶과 정신’이라는 교양 과목을 수강하면서 알게 되었다. 재일한국인이란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결과로 일본에 거주하게 된 한국인과 그 자손들이다. 재일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살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일제감정기 시대에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으로 인한 수탈과 억압으로 인해 일본으로 건너 간 사람들이 많았다. 해방 직후 다시 조국으로 귀국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경제적 사정으로 인해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에서 정착한 사람들도 있었다. 일본에서 정착한 재일한국인들의 삶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재일한국인들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일본에서 수많은 차별을 받았고 적은 임금을 받으면서 긴 시간을 노동하는 등 많은 착취를 당하였다. 이렇게 재일한국인들은 힘들게 살았다. 하지만 정부에서는 재일한국인들을 위해 보호하거나 지원해주는 것이 없었다. 재일한국인들이 일본 내에서 억압과 차별을 겪었던 시기에 그들이 의지했던 곳은 바로 창가학회였다. 창가학회는 국적이나 민족에 의한 차별을 하지 않았고 모두가 같은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런 점에서 재일한국인들이 창가학회에 의지를 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의 차별과 편견 속에서 재일한국인들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신앙심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무교로서 특정 종교를 믿거나 따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솔직히 신앙심만으로 그 당시에 힘든 삶을 이겨낸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하지만 그들은 힘든 상황에서도 버텨야하는 이유가 있었고 의지가 있었기에 버텨낼 수 있었을 것이다. 창가학회라는 종교가 재일한국인들이 낯선 타지에서 차별 없이 그들을 받아주고 희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게 해주었고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 시켜주었다. 내가 만약 그 당시에 힘든 삶을 살고 있었더라면 나 역시 종교를 믿고 신앙심이 있었을 것이다. 현재의 나 역시 힘든 상황이 있을 때에는 기도를 하거나 평소에 믿지 않던 신들을 마음속으로 믿게 된다. 그 상황에서 신을 믿는 다면 힘든 상황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솔직히 종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측면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창가학회는 북한정부와 한국정부보다 재일한국인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준 곳이다. 창가학회라는 종교는 힘없던 재일한국인들에게는 구원자이자 안식처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믿음의 힘이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 책에서 취재한 증언자들은 창가학회를 긍정적으로 소개하였다. 종교에 관한 분석은 객관적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도 창가학회는 재일한국인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을 것이다. 나는 이제까지 종교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종교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주고 긍정적인 효과를 나타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재일한국인들이 운명에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잘 살 수 있었던 것을 보니 종교의 긍정적인 면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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