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폭력의 세기 를 읽고 폭력의 세기 줄거리 폭력의 세기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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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29 / 2015.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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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세기’를 읽고
제가 읽은 책은 한아 아렌트가 쓴 ‘폭력의 세기’라는 책입니다. 책을 읽고 이해하려면 작가의 인물에 대해 조금 알고 읽어보는게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
인물 소개를 하자면 한나 아렌트는 1906년 독일에서 유태인으로 태어나 1933년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피해 파리로 옮겼다가 다시 파리까지 독일군에 함락되자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미국 시민권으로 획득한 망명학자이다. 자신이 살아온 20세기에 대한 저자의 시선은 비판적이다. 그녀에 있어 20세기는 폭력의 세기다. 시대에 어긋난 사상가는 드믈다. 더구나 동시대에 어긋나면서, 다른 시대를 예감했던 사상가는 극히 드믈다. 만일 19세기에 반하는 사상가로서 맑스, 니체, 프로이드 등을 언급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때문에 그들이 20세기를 자신의 세기로 선취할 수 있었다면, 20세기에 반하는 사상가의 목록에는 단연 아렌트가 그 상위에 올라야 한다. 전쟁과 폭력의 시대에, 독일 태생의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18년 동안이나 망명자로 살아야했던 아렌트는 20세기에 어긋나났을 뿐 만 아니라, 그 때문에 새로운 세기의 가능성을 엿 수 있었던, 몇안되는 사상가들 가운데 한 명이다. 국적을 잃은 망명자였기에, 시대의 내부에 거스르면서 외부의 시선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아렌트는, 그러므로 20세기로부터의 망명자였고, 동시에 이미, 세로운 세기를 사상적으로 예비했던 전위였다.
다시 폭력의 세기에 나오는 용어에 대해 설명하겠다.
행동은 behavior가 사회적으로 규범된 활동이라면, action은 기존 삶의 양태를 일정하게 벗어나는,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자발적인 활동이다. 이런 맥락에서 action은 praxis에 상응하는 용어로서, 현상태의 변화를 지향하는 실천적 함의를 갖고 있다. 따라서 action은 ‘행동하는 지식인’ 또는 ‘민중의 직접행동’에서처럼 행동으로 번역하고, behavior는 ‘형태주의 behaviorism에서처럼 ’행태‘, 또는 ’불법행위‘나 ’행위 규범‘에서처럼 ’행위‘로 옮긴다. 아렌트는 관조적 삶과 활동적 삶을 대비시키고, 활동적 삶을 구성하는 근본 활동을 노동, 작업, 행동으로 개념화하는데, 그에 따르면, 그중에서도 행동, 특히 정치적 행동이 가장 중요한 인간의 활동이다.
권력은 아렌트에 의하면 power는 그리스어 dynamis와 동일어로 간주하고 그 근대적 파생어인 potentia, 와 유사한 용어로서, 언제나 잠재적 성격을 갖는 권력이다. 이런 의미에서 권력은 함께 행동하는 사람들이 흩어지는 순간에서 사라진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power는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에서 주목하는, 권력과 구별되는 역능에 가까운 개념이다. 하지만 아렌트는 권력과 역능을 명확하게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권력이라고 지칭하는 것의 본질이 실제로는 역능이라는 것을 밝혀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 의도에 맞추어 power는 모두 권력으로 옮긴다.
아렌트에 따르자면, 폭력의 대립물은 결코 비폭력이 아니다. 폭력의 대립물은 권력이다. 이 테제는 얼핏 이해하기 어려울 수있다. 권력이 곧 폭력이라는 통념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렌트가 제시하는 다른 테제는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이 권력 이면에 있는 권력에 좌우된다. 이 두 가지 테제를 중심으로 아렌트의 독특한 개념적 배치를 간략하게 살펴볼 수 있다. 우선 폭력의 대립물은 권력이다. 폭력과 권력은 다르다. 폭력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고, 따라서 목적을 통해서만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이라면, 권력은 언제든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제휴하고 행동할 때 생겨나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 이미 정당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폭력을 사욜할 때, 그 권력은 자신의 손에서 빠져나가는 권력을 폭력 수단으로 필사적으로 만회하려는 불가능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로부터 아주 급진적인 해석까지 가능해질 수 있다. 폭력을 사용하는 권력은 이미 권력이 아니며, 아무런 정당성도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권력세력이 아니라 폭력 집단이다. 오히려 권력은 그러한 폭력에 대항하는 자들에게 있다. 권력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토론하고 함께 행동하는 그 순간에, 바로 그 곳에 존재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함께가 아닌 강제적이거나 혼자의 논리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그건 권력이 폭력이 될 수 없는 것이고, 그 권력이 인간의 능력에 있는 한 영원히 파괴될 수도 없다.
아렌트가 보기에 폭력에 대한 옹호는 19~20세기가 갖고 있는 ‘과학기술의 진보’라는 관념과 밀접하게 관련돼있다. 직선적이고 연속적인 진보, 어떤 수단을 통해서라도 목적을 달성하는 진조, 이러한 20세기의 관념은 언제든 목적을 내세워 폭력수단을 정당화하는 폭력에 대한 변론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렌트는 20세기에 잃어버린 인간의 의지 및 능력을 회복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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