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조선시대 해양유민의 사회사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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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해양유민’의 사회사를 읽고
그동안 제주도민이지만 제주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제주관련 이슈는 물론이거니와 제주도 역사에는 아예 무지했다. 탐라국을 만들었다는 삼신정도 아는 수준이었다. 평소 책과 거리가 먼 데다 딱딱한 역사논문에, 주제가 제주유민인지라 책을 읽기 전부터 걱정이 됐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제주유민이 발생한 원인을 태종 때부터 시작된 ‘말 교역 금지’ 정책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본 것이 새로웠다. 역사에 무지한지라, ‘이때 이런 사건이 있었구나’, ‘이때 제주도 상황이 이랬구나’ 하며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웠다.
제주는 가난했다. 화산암으로 이루어진 척박한 제주도의 토양은 농사를 짓기 어렵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 제주인들은 살기 위해 해산물을 채취하거나 교역을 했다. 하지만 이것도 녹록치 않았다. 해산물 채취만으로 생계를 이어가기는 어려웠고 잠깐이나마 제주도의 경제적 풍요를 가져다 주었던 말교역 산업은 정부의 규제를 받았다. 여기에 전염병이나 가뭄같은 재해까지 겹친다면 상황은 더 악화됐다. 지리적으로 제주는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제주가 이 같은 가난에서 벗어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 노력에는 ‘제주도를 떠나는 것’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이 바로 이 책에서 주제인 ‘출륙유랑민’을 말한다. 이들은 ‘포작인’ 또는 ‘두무악’이라 불리며 일정한 거처없이 바다위에서 떠돌았다. 일부는 해안가나 강원도 같은 산지 등에 정착하기도 한다.
‘조선시대 해양유민의 사회사’는 드문드문 있는 ‘출륙유랑민’에 대한 역사기록을 모으고 모아 그들이 떠날 수밖에 없었던 제주의 지리적, 정치·경제·사회적 상황을 분석한다. 그리고 그들이 제주를 떠나 ‘포작인’ 또는 ‘두무악’이 된 후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당시 사회는 그들을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풀어낸다. 즉, 그렇지 않아도 소외된 제주도 역사에서 더 소외된 한 집단을 분석한다.
저자 이영권은 ‘출륙유랑민’의 발생원인을 브로델의 ‘3층 구조’를 통해 설명한다. ‘3층구조’의 1층에는 환경적·지리적 요인이 바탕에 깔려 있으며 가장 중요한 역사적 요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2층에는 ‘사회사’라고 불리우는 집단의 역사, 집단의 운명적 요인이다. ‘국면’, ‘추세’ 등으로 번역된다. 3층에는 특정 사건에 의한 요인이다.
제주는 화산섬이다. 토양이 화산암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토질이 척박하고 농사를 짓기 적합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해산물 채취와 해산물 교역에 생계를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설사가상 전염병이나 가뭄같은 자연재해까지 벌어지면 이는 단순히 가난에 허덕이는 정도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하는 문제가 된다. 이것이 브로델의 ‘3층구조’에 가장 하단에 있는 환경적 요인이다. 이 요인이 다른 모든 요인 밑에 깔려있으며 가장 큰 영향력을 발생한다고 본다. 다른 요인들에 비해 절대불변한 부분이기 때문에 농본주의 사회가 끝나지 않는 이상 제주도민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2층 사회적 요인에는 먼저 ‘과도한 수탈’이 있다. 얼마되지 않는 농지에서 얼마되지 않는 농작물이 났음에도 전세를 걷어갔다. 공납과 진상의 부담도 컸다. 또한 제주목사 “장림”의 사례와 같이 지방관이 자의적으로 수탈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과도한 수탈은 ‘출륙유랑민’ 발생의 부분적인 요인이 될 수는 있겠지만 이는 전근대사회에 항상적으로 존재했던 요소이기 때문에 절대적 요인으로 볼 수는 없다.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요인 중 핵심적인 부분은 바로 ‘말교역 통제’이다. 15세기에 시작된 말교역 통제 때문에 제주의 경제기반이 무너졌고 이 영향이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고 본 것이다. 바로 이것이 15세기부터 17세기에 출륙금지령이 내려지기 전까지 ‘출륙 유랑민’이 대거 발생한 원인으로 보고 있다. 고려 말 ‘원’의 지배를 받으면서 제주도의 말 산업이 크게 육성된다. 제주도가 말을 기르기 적합한 지역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해산물 채취, 교역으로 먹고 살던 제주도민의 생활의 큰 바람이 분다. 말은 고가이지만 필수품이기 때문에 큰 이윤을 남길 수 있다. ‘말 교역’은 잠깐이나마 제주에 경제적 여유를 가져다준다. 그러나 조선 초 태종 때부터 제주의 말산업이 통제되기 시작한다.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정부의 영향력이 덜했던 제주는 조선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들어서면서 상황이 변한다. 지방토호세력들이 무너지고 사실상 정부의 영향권 안에 들어간다. 그러면서 상당한 이윤을 남기는 말산업 또한 정부 손에 들어간다. 이 같은 조치는 세종때에 이르러 더욱 강력해진다. 브로델의 ‘3층구조’에서 1층 사건·사고에 속하는 ‘우마적 사건’이 그 예이다. 말의 교역이 통제되자, 사람들은 말을 도살하여 말가죽이나 말고기, 활을 만드는데 쓰는 말의 힘줄같이 운반과 위장이 편리한 상품을 만들었다. 말교역 통제에 대한 제주인들의 응전이었다. 하지만 세종은 정부의 통제 정책을 피해나가던 제주인들을 그대로 놔두지 않았다. 그들은 평안도로 강제이주 되었다. 그리고 이후 말의 밀거래 또한 어려워진다. 제주민중들의 경제생활은 사실상 말 교역이 시작되기 전으로 돌아간다. 척박한 토지에서 농사를 짓거나 해산물을 채취해서 교역을 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두 방법 다 크게 생산성이 있지는 않았다. 그러다 극심한 가난을 이기지 못한 제주인들이 제주를 떠나 방랑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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