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사] - 송강 정철의 가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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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 송강 정철의 가사 연구 -
<목차>
머리말
송강의 생애
송강의 가사 분석과 감상
가. 성산별곡
나. 관동별곡
다. 사미인곡
라. 속미인곡
송강 정철의 가사가 가지는 문학적인 의의
맺음말
머리말
가사문학은 지금 2014년에 20대에게는 ‘어려운 문학 장르’라고만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가사문학을 고등학교 때, 수능을 위해서만 배우기 때문이다. 가사는 단순히 어려운 장르인 것만은 아니다. 가사는 4음4음보 연속체로서 비교적 단순한 형태로 되어 있는 시 장르이다. 가사는 조선시대에 주로 만들어졌다. 조선 초기의 가사는 비교적 단형이고 종결규칙을 지니고 있었으며 4음4음보를 기준으로 해서 음수와 음보가 유동적이었는데, 조선 후기에 오면 장편의 가사가 등장하고 종결규칙이 사라지는 경향을 보이며 음보와 음수에 변동이 생기기도 한다. 정병욱, 『한국고전시가론』, 신구문화사, 1994, 244쪽.
이러한 가사 장르는 우리만의 독특한 장르로, 현재에는 가사 장르가 쓰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가사는 시조의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런 영향은 이후 현대시까지 이어진다는 점에서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가사문학이 시조와 그 이후의 시가문학에게 미친 영향들이 그 문학들 가운데 살아있고, 그것들이 시를 공부하고, 쓰는 현대시 시인들에게도 계속해서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사문학에서 어떤 가사문학이 위대하다고 평가 받는가? 송강정철의 가사문학은 문학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논문에서는 송강 정철의 가사를 중점으로 송강 정철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송강 정철의 가사는 어떤 구성을 가지는지, 그것을 필자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감상한 후 송강 가사의 문학사적 의의까지 알아보고자 한다.
2. 송강의 생애
정철(1536~1593)은 박인로, 윤선도와 함께 한국 고전문학사에서 3대 시인이자 가사문학의 제일인자로 평가받고 있다. 정병헌·이지영, 『고전문학의 향기를 찾아서』,돌베개, 1998, 260쪽.
송강의 가문은 조상 대대로 내로라하는 가문은 아니었으나, 뼈대 있는 집안임에는 틀림없었다. 송강 부모 대에 이르러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으면서 집안은 크게 퍼져나갔다. 박영주, 『정철 평전』, 중앙M&B, 1999, 19쪽.
송강은 이 시기에 궁궐에 드나들게 되면서 명종과 친하게 지냈다. 그러나 송강의 나이 10세(1545) 되던 해, 집안은 을사사화로 풍비박산되고 만다. 이 사화로 인해 매형과 맏형은 죽임을 당한다. 그러다가 부친이 유배에서 풀려나자 조부 위의 산소가 있는 전남 담양의 창평 당지산 아래로 가족들과 함께 내려와 27세로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이곳에 머문다. 정병헌·이지영, 앞의 책, 261쪽.
이곳에서 송강은 자연과 더불어 불안해진 심신을 안정시켰다. 송강은 아버지의 유배가 풀려 창평에 깃들어 살게 된 16살 이후에야 비로소 수학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이것은 김윤제의 적극적인 주선과 배려로 시작되었다. 송강의 학문적 스승으로는 단연 하서 김인후와 고봉 기대승을 꼽는다. 이들은 정철의 문학적 사상의 기반이 된다. 송강의 문학적 스승으로는 누구보다도 면앙정 송순과 석천 임억령을 든다. 면앙정으로부터는 특히 국문시가를, 그리고 석천으로부터는 특히 한시를 세련되게 배워 익혔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문과 문학은 이로 서로 연관되어 계속해서 각자의 발전에 있어 큰 도움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송강은 좋은 스승도 있었지만, 좋은 벗들도 있었다. 특히, 율곡이이·우계 성혼과는 각별한 사이였다. 박영주, 위의 책, 39~63쪽.
율곡이이과 우계 성혼은 송강이 정계에 진출하기 전부터, 정계에 진출하고 나서까지 많은 의논을 하고 서로를 지탱해 주는 좋은 벗들이었다. 26세 때 진사시험에 일등한 송강은 이듬해 27세(1562) 되던 해 3월 문과 별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비교적 조용한 벼슬살이를 하던 송강은 모친의 상을 지나면서 낙향과 출사를 반복한다. 당쟁이 격화되었기 때문이다. 40세 초반에 낙향하여 창평에 거주하는 동안, 송강은 「성산별곡」을 비롯해 많은 문학작품을 창작하였다. 이후, 선조가 송강을 두둔하면서 송강은 다시 정계활동을 하지만, 율곡 이이의 죽음으로 인해 다시 창평으로 낙향한다. 약 4년 간 시작(詩作)에만 전념하였으며 이때 송강정을 지었다. 이곳에서 연군의 정을 노래한 「사미인곡」, 「속미인곡」등을 비롯한 시조들을 창작하였다. 정병헌·이지영, 앞의 책, 262~266쪽.
송강은 문학적으로 뛰어나다는 평판을 받지만, 정치적으로는 악평을 받아왔다. 송강에 대판 평가는 기축옥사 때문에 두 갈래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때는 송강의 나이 54세, 1589(선조22년) 기축년이다. ‘정여립 모반사건’을 시발점으로 선조 임금은 특명으로 송강을 의정부 우의정에 임명한다. 선조 시기의 동인들이 득세했던 것과 관련해 동인의 정여립이 모반을 도모했다는 것이 정여립 모반사건의 시작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선조가 동인을 견제하여 서인인 송강을 그 자리에 앉게 하였다는 해석도 있다. 송강은 사면을 청하지만 윤허하지 않아 직에 나아가게 되어 이에 겸해 옥사를 다스리는 위관의 직책을 맡는다.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인해 벌어진 기축옥사를 주로 송강이 위관이 되어 조사·처리하면서, 동인의 주요 인물들이 거의 제거되었다. 이것으로 인해 송강이 정치적으로 악평을 받는다. 송강은 실제 자신의 원수(怨讐)였던 이발을 책망하면서 이발을 죽이게 되는데, 법에 따라 이발의 어린 자식과 이발의 노모까지는 죽이지 않으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선조가 분노하여 이들을 죽이라고 명하였다는 것이 기록된다. 이런 모습은 송강이 위관으로서 자신의 소임을 다했지만 법에 따라 집행하였고, 정적을 제거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악인이 아닐 수 있다고도 보인다. 어찌되었든 정철이 위관을 맡아 그의 평가가 후대에까지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는 이발을 비롯하여 이 일로 숙청된 인사가 1,000여 명에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박영주, 앞의 책, 315~319쪽.
위관을 지낸 뒤 왕의 총애를 받지만 이후에 선조는 송강을 56세 때, 왕세자의 책봉 문제로 송강은 왕의 분노를 산다. 연려실기술에는 “임금이 크게 노하여 이날부터 정철을 크게 미워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때 임금은 정철을 독철, 간철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이것을 이유로 송강은 귀양살이를 한다. 송강은 57세인 1592년(선조25)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면을 받아 임금께로 나아간다. 임진왜란이라는 큰 나라의 사건이 생긴 만큼 이런 사면들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송강은 나라의 큰 일이 생겼는데, 자신만 자연에 있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임금의 명을 받고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이후 송강은 그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명나라에 다녀온다. 그러나 나라와 임금을 보필하고 명나라를 다녀온 송강은 동인에게 모함을 받아 사직한다. 정병헌·이지영, 앞의 책, 2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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