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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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최치원에 대하여
최치원선생의 설화
경주 최씨의 시조로 신라말엽의 대석학인 고운 최치원을 든다. 최치원은 그 높은 학문이 이 나라는 물론 멀리 중원땅에까지 널리 알려진 성리학의 창세적 기원을 편 학자일 뿐 아니라 대동학 문학의 시조를 이룬 문호로도 이름 높다. 그런데 경주최씨의 시조인 최치원은 기이한 전설을 남기고 있다. 원래 경주 최씨의 시조는 금빛이 나는 돼지(金豚)에서 낳았다 하여 일명「돼지최씨」라고 불리어 오는데 이것은 단군이 곰에서 낳았다는 전설과 또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박속에서 낳았다는 우리 전래의 민족설화와 함께 이 경주 최씨도 중요한 민족설화의 하나가 되어 있다. 그 설화가 지금은 행정상으로 군산시에 속해 있는 고군산별도의 하나인 내초도와 연관지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섬 안에 금돈시굴이라는 굴이 아직도 그 흔적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금돈시굴에서 낳았다는 전설상의 최치원은 바로 내초도 안에 아직도 그 흔적을 남기고 있어 금돈시굴이 삼터(出生地)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최치원이 전설상으로만 전해지는 인물은 물론 아니다.
글을 읽는 자천대
삼국유사나 여지승람에는 그의 뛰어난 사적을 정상에 담아 있고, 또 그만한 출중한 인물이기에 그만한 전설상의 이야기를 남기고 있는 것임에 분명하다. 다만 그의 출생이 오늘날에 와서 믿어질 수 없는 금 돼지에서 낳았다는 것인데 그것이 내초도에 있는 금돈시굴과 묘한 일치를 보이고 있다는 데 비상한 흥미를 끌고 있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이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군산지방의 인근인 군산시일대는 최치원과 얽힌 사연은 여러 가지 문헌상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 군산시 상평마을에 있는 자천대가 바로 그것이다. 군산시지에 나타난 이자천대는 최치원이 일찍 당나라에서 큰 벼슬과 학문을 닦고 나라에 돌아왔을 때 세상이 극도로 어지러워 민심이 흉흉하자 그 홀로 이 자천대에 올라 망망대해를 조망하며, 독서삼매로 시름을 달랬다는 것인데 애당초 이 자천대는 군산의 현 비행장 안에 있었던 것을 상평마을에 옮겼다는 것으로 원 자천대 부근에 곧고 매끄러운 암석 위에는 최치원의 무릎 자욱과 먹을 갈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군산시지는 또 그가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이 고을의 태수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고, 이보다 더 큰 벼슬이 내렸어도 그는 이를 사양하고 이곳 태수만을 지냈다는 것이다. 아무튼 최치원과 군산땅은 이러한 일련의 전설을 통해 기이한 인록(因綠)을 맺고 있는 것이 틀림없고, 그래서 내초도의 금돈시굴은 최치원이 그곳에서 낳았다는 전설을 더욱 밑받침하는 전설이 되어 있는 것이다.
출처: http://www.cein.or.kr/chonbuk_culture/book-chonbuk/history/400322h22.html
최치원(崔致遠)
857(문성왕 19)~? 신라 말기의 학자문장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 혹은 해운(海雲). 경주 사량부(沙梁部, 혹은 本彼部)
출신.
1. 가계 및 유년시절
견일(肩逸)의 아들이다. 신라 골품제에서 6두품(六頭品)으로 신라의 유교를 대표할만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최씨 가문 출신이다. 특히, 최씨가문 가운데서도 이른바 신라 말기 3최(崔)의 한 사람으로서, 새로 성장하는 6두품출신의 지식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세계(世系)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버지 견일은 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崇福寺)의 창건에 관계하였다.
최치원이 868년(경문왕 8)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아버지 견일은 그에게 10년 동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격려하였다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뒷날 최치원 자신이 6두품을 득난(得難)이라고도 한다고 하여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었던 점과 아울러 신흥가문출신의 기백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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