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평안도 농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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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평안도 농민전쟁
한국근세 사회의 구조와 문화
조선 후기의 저항운동은 국가 권력의 장악을 목표로 한 ‘변란’과, 민들의 생활과 관련되는 봉건적 잔재를 타파하는데에 초점을 두고 농민이 봉기한 ‘농민항쟁’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사실 평안도 농민전쟁이란 용어 자체에는 그것을 농민항쟁으로 보는 시각이 담겨 있다. 즉, 우리 조의 입장은 후자이며, 보고서 작성에 있어서도 그것을 ‘농민항쟁’으로 평가하는데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평안도 농민전쟁은 민란의 선구라고 불리지만 사실 변란적 요소도 있다. 여기서는 그와 같은 논쟁을 각각의 주장의 근거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변란으로 보는 입장
홍경래 난은 민란의 선구였지만 변란의 대표적 사례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난에서는 홍경래를 비롯한 ‘저항지식인 ’들과 장사壯士층이 봉기를 조직하고 이끌었다. 이들은 경제 형편과 사회적 처지에 있어서 농민과 별로 다를 바 없었으므로, 그들은 의식과 행동 면에서 농민들과 강한 친화력을 가졌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중간 실력자들이 농민들 중에서 군대를 뽑아 올리게 하였으므로, 농민들은 자발적으로 봉기군에 가담하지 못하였고 중간 향반층을 통해 참여하였다. 봉기군의 전세가 급격하게 약화된 것도 이런 주력 부대가 가진 취약성에도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군대를 조직하여 ‘이씨 왕조’를 타도하려 하였으나, 그들 지도부 자체는 아직도 상당 부분 봉건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 결국 홍경래 난이 지향한 것은 반봉건 투쟁이라는 측면보다는 지방행정권이나 세도정권에 대한 저항이라는 반정부적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난의 모의나 진행 중에 토지개혁이나, 신분제 폐지, 삼정의 개혁 등 가난한 하층 농민들을 위한 정책은 아무것도 구상되지 않았다. 또한, 식량을 공짜로 나누어 줌으로써 빈민들의 참여를 이루었으나, ‘정진인’이 와서 세상을 구할 것이라는 등의 신비적인 구호를 내세우는 데 그치고 일반 농민의 자발적인 참여를 불러일으킬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단지 정권욕에 군사를 일으켰다는 비난을 받게도 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위에서 보듯이 홍경래 난이 무엇보다 변란이라고 할 수 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난을 일으킨 의도가 처음부터 반봉건적이라기 보다는, 소외된 계층에 대한 불만에서 정권을 획득하려는 정치적인 의도가 강했다는 점, 그리고 정작 이끌어가는 계층이 타도하려는 타성을 버리지 못했다는 점, 거기에 비록 후반에 자발적인 농민의 참여가 있었지만, 이는 난의 지도부층을 포함 난의 구성원들이 처음부터 염두에 둔, 즉 의도하고 예상했던 현상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뒤의 상황은 우연적으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민란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점을 말할 수 있겠다.
2. 농민항쟁으로 보는 입장
변란의 입장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평안도 농민전쟁의 지도세력은 향반, 지식인층,사상 및 중소상인 등이었다. 그러나 항쟁의 지도세력과 그들의 성격만을 가지고 그것이 ‘변란’에 지나지 않았다고 보는 주장은 항쟁의 발전방향과 그 영향력을 무시한 것이다.
그러한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우선 항쟁의 참여세력에 있어서의 변화양상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우선, 항쟁의 하층군병은 광산노동층과 농민층이었다. 광산노동층이 일반농민층보다는 수적으로 앞섰는데, 이는 당시 일반민과 대립될 수 밖에 없던 항쟁 지도부층의 성격때문이었다. 그러나 광산노동자층의 성분을 분석해보면, 이들은 대부분 무전농민층으로 임금을 받고 농업과 광업을 겸업하거나 토지을 잃고 광산에 와서 임금노동자가 된 전업 농민층이었다. 따라서 본질은 ‘일반 농민’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항쟁군의 하층군병이 된 광민 및 농민층은 투쟁과정에서 실제로 피를 흘린 층이었으며, 이들 없이는 항쟁이 불가능하였다.
한편, 항쟁이 진행되면서 봉기군의 숫자는 급격히 늘게되었고, 이에 따라 그 구성원층에 있어서도 변화가 생겨났다. 농민의 수가 점차로 늘어난 것이다. 본래 1000명으로 시작되었던 항쟁군의 숫자는 항쟁중반을 넘어서면서 수천명으로 늘어났고 그 구성비에 있어서 농민의 비율도 상당히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항쟁군이 내거는 강령에 있어서도 초반에 지극히 정치적 색채만을 띠었던 것과 달리, 빈농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개혁을 요구하는 내용들이 추가되게 된다.
점차로 늘어난 농민항쟁군의 수는 정주성 퇴거 이후에 급격히 늘어난 양상을 보인다. 이 시기에는 관군의 무자비한 횡포로 인하여 정주성으로 도망 들어온 농민들까지도 합세하여, 항쟁군에 있어 그 수가 급격하게 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이르러 농민들은 자발적인 참여의 성격을 띠어, 항쟁군에 있어 농민군이 일선 행동대의 주축을 이루기에 이른다. 이것이 항쟁군이 정주성에 들어가서 넉달 가까이 4배나 우세한 관군을 상대로 버틸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 또한 정주성 항쟁때에는 정주성 주위의 백성이 봉기군을 위하여 정보와 식량을 제공하였던 것이 항쟁군이 버틸 수 있었던 큰 힘이 되었는데, 이것 또한 백성의 자발적인 참여현상으로써 지적하지 않을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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