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저뚱의 문학관과 문학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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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마오저뚱의 문학관과 문학정책
1949년 7월 베이징에서 열린 제1차 중화 예술 공작자 대표대회와 10월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일반적으로 당대문학의 시작으로 여긴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마오저뚱의 문학관 및 이것을 기본으로 창안되고 제정된 문학 정책은 중국의 일부 지역뿐만 아니라 중국 대륙 범위 내에서 중국문학의노선, 방침, 정책 등으로 확립되었다. 마오저뚱의 「연안 문예좌담회 1942년 5월 4일 연안에서 당 주석 마오저뚱의 명의로 개최된 문예좌담회. 마오저뚱은 문예계의 당면과제에 대하여 다음 다섯가지 문제를 제기 하였다. 첫째 문예공작자의 입장문제, 둘째 태도문제, 셋째 공작 대상문제, 넷째 공작문제, 다섯째 학습문제
에서의 연설」은 중국 문학이 반드시 준수하는 ‘강령’(綱領)과 같은 문건이 되었다. 당대 문학의 기본적인 상황을 고찰하려면 자연히 마오저뚱의 문학관과 정책에 대한 이해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1. 마오저뚱의 문학관이 제기된 배경
마오저뚱 문학관은 대체적으로 현실의 긴박한 문제에 대해 내린 대답이라 할 수 있다. 문학과 예술에 대한 그의논술은 분명하게 혹은 은밀하게 정치적 의미를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어떤 정치적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오저뚱은 아주 명확하게 정치적 임무의 필요에서 문학을 바라보았다. 19세기 이래 중국이 근대국가를 건립하는데서 당면한 문제들과 마오저뚱이 영도하는 혁명이 당면한 문제들은 마오저뚱이 문예방침과 정책을 고려하는 출발점이었다. 마오저뚱은 「연설」중에서 본인을 ‘마르크스주의자’로 자칭하였고, 일반적으로도 그의 주장은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의 일부 혹은 이러한 이론의 ‘발전’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마오저뚱의 문학관을 이해할 때, 그가 마르크스주의 창시인의 관점을 받아들이는 중점 및 어떻게 ‘개조’를 진행하는지를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는 「연설」에서 문학예술 사업은 반드시 전체 ‘혁명기구’ 중의 ‘기어와 나사’가 되어야 한다는 레닌의 논술을 집중적으로 인용하였으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작가의 세계관과 창작방법, 작품의 경향성과 예술성의 모순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레닌이 같은 글에서 “문학 사업 중 기계적 ‘평균’, 수평화, 다수에 대한 소수의 복종 등은 최소한 이겨낼 수 있어야한다”, 문학 사업은 “무조건적으로 개인의 독창성, 개인 애호의 드넓은 벌판, 사상과 환상, 형식과 내용의 대지를 반드시 보장해야만 한다” 등의 예술 규율에 대한 논술에는 주의하지 않았다. 마오저뚱의 이러한 인용은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문예관 중의 중요한 모순을 상당 부분 지워버린 것이었다. 마오저뚱이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과 정책을 ‘흡수’한 사실을 고찰할 때, 스탈린-츠다노프가 1930~40년대에 소련에서 실행한 문예 노선과의 관계도 주의해 볼만하다. 1950~60년대 마오가 중국 문예계를 통제하는 데 사용한 일부 방식은 확실히 스탈린-츠다노프 노선의 재연이었다. 그러나 그는 50년대 중반 이후에는 확실하게 소련 노선에서 벗어나는 독립적인 입장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마오저뚱의 문학관은 근원에서 또한 중국의 전통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것은 그가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에 대하여 행한 ‘중국특색’을 갖춘 개조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문학 전통 중에서 주도적 지위를 차지한 것은 유가(儒家)의 관점이었다. 마오저뚱의 문학관이 사용한 개념과 표현방식은 물론 전통 유가의 문학관과는 다르나, 문학을 사회정치적 교의(敎義)의 매개로 삼고, 문학의 사회정치적 기능면을 내세워 강조했다는 데서는 일맥상통한다. 그밖에 마오저뚱의 문학관에는 중국 농민 문화의 가치관과 심리도 스며들어 있는데, 이것은 실리적 요구에 더욱 가까운 것이었다. 이것은 당대 중국에서 문학과 현실생활의 사건, 구체적인 정치활동과의 관계가 더욱 직접적이 되도록 이끌었으며, 문학의 현시성(現時性)이라는 사회적인 효응을 더욱 중시하도록 하였다.
중국에서는 또한 마오저뚱을 탁월한 시인으로 본다. 그의 문학 활동과 관심, 그의 문학관과 정책 간에는 복잡한 관계가 존재하였다. 그가 쓴 시와 사(詞) 중에서 일부는 정치관과 정서의 도해(圖解)였지만, 확실히 다른 일부에서는 시인으로서의 기질과 소양을 표현하였다.
2. ‘신문화’ 건립을 위한 끈질긴 노력
마오저뚱은 경제기초와 상부구조 간의 관계에 관한 마르크스의 이론을 받아들였으며, 그것으로 문학의 제반 문제를 고려하는 출발점을 삼았다. 마르크스는 1859년의 『정치경제학 비판서언』에서 일정한 ‘경제기초’가 ‘상부구조’의 성질과 상황을 결정한다는 논술을 하였다. 마오저뚱은 이 명제로부터 출발하여 중국 문화(문학)의 문제를 토론하였다. 그는 “중화민족의 구(舊)정치와 구(舊)경제는 중화민족 구시대 문화의 근거이며, 중화민족의 새 정치와 새 경제는 중화민족 새 문화의 근거이다.”라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문학과 예술을 이데올로기‘의 상부구조로 보았다. 마오저뚱은 중국에 새로운 경제기초와 정치제도가 출현함에 따라 반드시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문학, 예술이 세워지고 등장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30년대부터 그는 각기 다른 각도에서 새로 만들어질 신문화(문학)를 명명하려 하였고, 이후 사람들이 준수할 만한 목표들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신문화(문학)의 건립을 위하여 마오저뚱은 일련의 비판 운동을 일으키고 지도하였는데, ’구문화‘(문학) 및 그 이론의 기초와 대표자들을 비판함으로써, 신문학의 등장을 위해 토대를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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