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여운형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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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해방 전후사의 인식
여운형
① 여운형의 생애사와 주요 쟁점들
몽양 여운형은 1886년 5월 25일(음력 4월 22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곡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여정현으로 임진왜란 직후 최초로 수호사로 일본에 갔던 여우길의 10대손이며, 모친은 백사 이항복의 11대손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조부 여규신에게 한학을 배웠고 많은 감화를 받았다. 조부 여규신은 구한말 중국이 우리나라를 속국으로 얕잡아 보는데 분개하여 정부에 중국정벌을 건의하고 결사를 꾸미다가 유배를 갔다 올 정도로 기개에 찼었는데 여운형은 조부의 웅지를 늘 높이 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로부터 민족자존과 자주정신을 배웠던 셈이다. 조부의 기개에 감동된 그의 민족자주 정신 항일 독립운동의 노선에서 잘 드러났다.
몽양은 향리에서 한문을 수학하다가 15세 때 서울에 올라와 배재학당 홍화학교에서 신학문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모진 시련이 다가왔다. 결혼한 지 4년 된 부인이 세상을 뜨고, 같은 해 할아버지가 별세했으며, 을사보호조약으로 나라가 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수학을 단념하고 향리 양평에 내려와 집안의 아픔을 딛고서 국채보상운동 단연동맹을 조직하였다. 스스로 담배를 끊고 금연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하여 각지로 순회연설을 다니는 등 열혈애국청년으로 변모해갔다. 1907년 기독교에 입문한 그는 개화사상에 눈을 떠 관동학교를 설립했다. 동방에 빛이 될 인재를 양성하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꾀하고 독립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광동학교 이후 초당의숙에서 교편을 잡았던 24세 시절에 가장 감개가 깃들었다고 회상한다.
중국 금릉대학을 마치고 상해로 들어간 여운형이 이범석을 중국에 데려가 독립운동가로 키웠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상해 임정 태동기에는 제 9대 임시의정원 의장으로서의 임정의 산파역을 맡기도 하였다. 1918년에는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2.9독립선언과 3.1독립운동에 간여하였다. 또 1월에는 김규식을 파리강호회의에 파견하였고 국내와 일본 및 간도, 시베리아 방면에도 사람을 잠입시켜 독립운동에 관한 여론을 확산시켰다. 또한 몽양은 상해 임시정부의 의무차장을 지내고 상해 교민단장으로 활동했으며, 교민들의 독립사상과 애국정신을 고취시킬 목적으로 인성학교를 설립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는 또한 1919년 11월 적지인 동경 제국호텔에서 일본의 식민정책을 혹독히 비판하는 연설을 하였다. 동야평화, 세계평화에 위배되는 일제의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여 일본 정계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세계의 여론을 집중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는 서간도, 중국, 모스크바, 몽골, 필리핀, 일본 등지를 떠돌며 애국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몽양은 1926년까지 임시정부에서 외교위원으로 활동할 때, 나라를 빼앗긴 약소국의 대표로서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하여 의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몽양의 해외활동은 상해 야구장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면서 막을 내렸다. 그는 큰일을 하면서도 인간미를 풍부히 지닌 채 작은 일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29년 상해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될 때까지 그의 중국시절은 그가 독립운동의 거두로 자라나는 선장의 시기이자 국제정세의 흐름과 역학관계를 파악하여 후일 정치인으로서 뛰어난 판단력과 균형감각을 갖추도록 하는 밑거름이 되어준 시기였다. 특히 이 시기 중국국민당과 공산당에 두루 가입하여 중국의 민족혁명과정에서 국공합작과 통일전선의 중요성을 뼛속깊이 체험했다. 몽양은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어 국내에서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하여 민족적 정론을 펼쳤다. 언론을 통한 민족운동 시절, 그는 손기정 일장기 말소 보도를 맨 처음 주도적으로 보도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몽양의 행적은 해방 전후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1944년 조선 건국동맹 발족과 해방이후 1945년 건국준비위원회의 수립이 바로 그것이다. 일제의 혹독한 탄압시기에도 국내 최대의 비합법 조직인 ‘조선 건국동맹’이 결성되었다는 것은 독립투쟁사에 뚜렷한 획을 그을 만큼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건국동맹에 대한 정확한 평가야말로 일제강점기 몽양 여운형의 사상과 활동을 평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항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건국동맹은 개인과 당파에 관계없이 각계각층을 망라하고 모든 민족성원들이 대동단결, 거국일치에서 패망을 눈앞에 둔 일제에 결정적 타격을 가하고 다가선 해방조선의 정국을 보다 주체적이고 주동적인 힘으로 맞이하자는 목적에서 결성된 것이었다. 그동안 건국동명의 명칭, 결성시기, 조직 범위, 해외연계 사항 등은 불확실하거나 이설로 추정되어 왔으나, 최근에 증언채록 등 근거를 찾아내는 가운데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명칭에 있어서 조선민족 해방연맹, 조선 해방연맹, 인민전선, 인민위원회, 농민동맹 등과 건국동맹의 상관관계를 밝히고 있으며, 그들과 건국동맹의 상관관계 및 청년학생조직의 실체, 노동자, 부녀자, 사무원조직, 학병 징병 징용거부자 조직, 군사조직 해외혁명단체와의 연계 등도 밝혀지고 있다.
결성시기에 관해서는 1940년대 전후에 결성된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최근 연구는 1942년 겨울 서대문형무소에서 구상한 것이며 1943년 중반까지 구상하였고 출옥 직후인 1943년 8월 10일경 ‘조선민족해방연맹’이라는 잠정조직을 1944년 8월 건국동맹으로 발전시켰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먼저 조선민족해방연맹을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연락원을 배치하고 하부기반을 다지기 시작하는 등 구상단계, 준비단계, 결성단계, 활동단계를 거쳐 1년여에 걸친 노력의 결과로 조직된 것이지, 어느 날 모여서 전격적으로 결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조직 작업에서도 일제의 요시찰을 피해서 서울을 비롯한 전국 13개 지방도시, 농촌 산골을 헤매며 변절하지 않은 애국자를 찾기란 여간 힘든 작업이 아니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것도 한 번에 되는 것이 아니라 두 번, 세 번을 찾아가야 되는 것이다. 몽양은 3.1운동 이후부터 줄곧 조선의 완정독립을 위해서는 무장 실력부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만군을 중시하고 조직을 만들고자 했다. 몽양의 지시를 받아 만군에서 건국동맹을 조직하고자 했던 사람이 바로 박승환이다. 당시 항공장교였던 박승환은 항공병을 핑계로 1944년 1원, 1945년 2월, 8월 등 세 차례 이상 국내에 들어와 여운형과 군사 문제를 상의했다. 이와 같은 몽양의 무장노선에 대한 노력은 1922년 11월 한국노병회를 경성하여 일 만명 이사의 장교와 기사를 양성하는 등의 결과로 이어진다. 이것은 일제에 의한 재판기록에도 잘 드러나고 있다. 1940년대에는 비밀리에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여 후일에 대비했고 국내 상해 연안 등을 연계한 국내진공 작전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그는 일제 말기에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해 해방을 준비했고 일본총감으로부터 행정권을 이양 받은 유리한 조건이었다.
새로운 정부 건설을 위한 몽양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갑작스럽게 전해진 일제의 항복 소식으로 사회는 커다란 혼란에 빠질 위험이 있었다. 일본이 항복하자 일본인 기업주나 지주들은 자신들이 가진 재산을 처분하고, 일본으로 도피하였다. 노동자들은 일본인 기업가가 시설을 파괴하고 재산을 빼돌리는 것을 막기 위해 공장의 재산을 관리하는 한편, 생산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농민들 사이에서도 일어났다. 농민들은 동양 척식 주식 회사나 일본인이 소유한 토지를 접수하여 공동으로 경작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여운형은 새로운 정부 수립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건국 동맹을 기반으로 하여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만들어 각 지역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였다.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한편, 식량을 비롯한 생활 필수품 확보에도 노력하였다. 이와 같은 여운형의 노력은 처음에는 순조롭게 구성되어 갔다. 좌우익의 지식인은 물론 각지의 유지까지 광범위하게 참여하여 만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은 것이다. 미군의 주둔이 다가오자, 여운형은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의 중앙 조직을 실질적인 정부 형태로 개편하여 조선 인민 공화국을 선포하고, 각 지부를 인민 위원회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좌익이 조선 인민 공화국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일부 민족주의 세력이 탈퇴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한반도에 진입한 미 군정은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인민 공화국이나 지방 인민 위원의 활동은 커다란 지장을 받고 실패하고 말았다.
② 해방 전후 여운형의 활동상에 대한 관점 정리
① 우파 - 이승만
여운형의 생각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우리 우파 세력만으로도 가능한 국가 건설을 굳이 우리와 생각이 다른 좌파와 같이 할 필요는 없다. 지금은 하나의 목적으로 모인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그 차이를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더욱이 여운형의 활동을 돕는다면 한반도에서 나의 입지는 줄어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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