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의 개화기 과정 비교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15.03.29 / 2015.03.29
  • 3페이지 / fileicon hwp (아래아한글2002)
  • 평가한 분이 없습니다. (구매금액의 3%지급)
  • 800원
다운로드장바구니
Naver Naver로그인 Kakao Kakao로그인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이전큰이미지 다음큰이미지
본문내용
한국과 일본의 개화기 과정 비교
일본의 개화기 과정
막말 (幕末 = ばくまつ) (1853 ~ 1867)
1. 근대화로의 태동기
1853년 우라가(浦賀) 앞바다에 페리가 이끄는 미국의 함대가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면서, 도쿠가와 막부(幕府)의 말기(末期)라는 격변의 시대에 접어든다. 이 시대는 에도시대를 마감하는 시기이자, 근대 서양의 제국주의적 왕정(王政)으로 이행하는 기반과 환경이 만들어진 시대이다.
막부는 끈질기게 개항을 거부하였으나 결국 미국의 강력한 개항요구에 밀려 1854년 카나가와에서 일미화친조약을 체결하고 시모다 항과 하코타테 항을 개항하였다. 이어 1858년 미국의 통상 요구에 다이로(大老) 이이나오스케가 조정의 허락도 없이 단독으로 일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해버렸다. 일미수호통상조약은 치외법권허용, 관세자주권 포기 등 상당히 불평등한 조약이었는데, 결국 이이나오스케는 존황양이론자들에게 암살 당하고 만다.
개항 이후 수출의 급증으로 일본 자국 내에서는 물자부족현상으로 물가가 급등하는 경제혼란이 일어났다. 이에 사쯔마와 초오슈우의 하급무사들이 존황양이운동을 일으키고 영국과 네덜란드, 프랑스, 미국 등의 열강의 함대들과 교전 상태에 들어갔으나 열강의 힘에 밀려 결국 양이를 포기하고 존황도막, 즉 막부를 타도하는 쪽으로 방향수정을 하였다. 사쯔마와 초오슈우는 삿초 동맹을 맺고 신정부 수립을 목표로 영국의 지원 하에 서양식 신식 군비를 정비하였다. 이에 막부도 프랑스의 원조를 받아 쵸오슈우를 정벌하는 등 치열한 대립상황에 빠진다. 여기에 폭동과 농민봉기까지 일어나 일본사회는 극도의 혼란상황에 이르게 되어 15대 쇼군 요시노부가 왕정복고를 선언하고 정권을 천황에게 반납했으나 신정부는 요시노부의 영지와 관위를 빼앗아 버렸다. 이로 인해 막부의 무사들이 교오토오에서 도바·후시미 전쟁을 일으켰고 결국 이 전재에서 신정부군이 승리하게 되었고 에도 막부의 시대는 끝나버렸다.
메이지(明治)시대 (1868 ~ 1912)
1868년 메이지 천황은 신 정부 정치방침인 5개조 선언문을 발표, 연호를 메이지로 정하고 1867년 쿄오토에서 토오쿄오로 천도하였다. 신 정부는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체계를 위해서 메이지유신을 단행하여 다이묘들의 영지와 영민을 천황에게 복속시키고 세금을 정부에서 받았으며, 모든 지방관을 중앙정부에서 파견하였다. 또한 사민평등을 선언하여 신분제를 폐지하였고 평민들도 성(姓)을 가질 수 있게 하였으며, 직업 선택과 거주이전의 자유를 주었다. 또한 부국강병책을 시행하여 정부가 직접 관영공장을 세우고 광산을 개발하는 등 근대산업의 발전을 추진하였으며 전신, 우편, 화폐, 철도 교통 등의 근대적인 제도개혁에도 힘썼다. 메이지 정부는 근대화를 위해 1873년 징병령을 내려 군대를 조직하고 1882년 일본은행을 설립하는 등 계속적으로 개혁에 힘썼다. 이어 개혁정치를 위한 자금마련에 나선 메이지 정부는 지조개정(地租改正)을 실시, 땅을 갖고 있는 만큼 현금으로 세금을 내게 하였다. 그러나 이 조세개혁은 여전히 소작인들 같은 빈농들에게는 불리한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의 공장으로 향하였다. 이들은 일본 근대산업 발전을 위한 노동력이 되었고, 한편 일본 군대의 주요 병력이 되기도 했다.
1872년 메이지 정부는 근대적인 교육을 위해 학제를 개정, 모든 국민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는데 차츰 소학교교육이 확산되었다. 이후 토오쿄오의학교(現 토오쿄오대학), 게이오의숙, 토오쿄오전문학교(現 와세다대학) 등 고등교육기관도 속속 세워졌다. 이러한 메이지 정부의 서구화 정책은 태양력과 7요제도, 1일 24시간제, 단발과 양복, 기독교의 인정, 신문 간행 등 국민생활 전반에 걸쳐 그 영향력을 발휘하여, 이름하여 일본의 문명개화가 이루어졌다.
일본의 국민적 베스트셀러였던 학문을 권함의 작가, 후쿠자와 유키치 등에 의해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등 근대 구미의 사상이 소개되면서 일본 전역은 자유와 평등, 인권주의 사상으로 물들게 되었다. 이에 헌법의 제정과 의회를 통한 정치를 주장하며 일본 최초의 정당인 자유당이 생겨났고(1881년),곧 이어 영국식 의회정치를 주장하는 입헌 개진당이 생겨났다. 결국 1889년 히토오 히로부미 등은 독일 헌법을 본뜬 대일본제국헌법을 공포하고 1890년 제국의회를 개설하였다. 이어 1890년 일본 최초의 중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선거권이 제한적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국민의 1%정도가 선거에 참여할 수 있었다.
자료평가
    아직 평가한 내용이 없습니다.
회원 추천자료
  • 미국 북장로회 서울 선교지부와 평양 선교지부의 관계
  • 한국 기독교』(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3), 130.서울 선교지부 형성 과정은 해외선교본부의 인적․물적 지원은 물론 한국 정부에 대한 미국 공사관의 적극적인 교섭, 한국 정부의 승인, 한국 백성들의 관심과 참여를 바탕으로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서울 선교지부의 외형적 구조가 형성되면서 선교사들은 신속히 한국 전체를 기독교의 영향권 아래 두고자 했다. 이를 위해 서울 선교지부 선교사들은 한반도 전역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지 답사

  • 한국 전통 식문화의 대표주자 ‘김치’
  • 한국 고유의 식품저장 지혜다. 중국과 일본에도 채소의 소금 절임이나, 된장 간장에 담근 장아찌식 절임과 젖산발효 초기에 버무린 비교적 담백한 야채 절임류가 많다. 그러나 식품의 다섯 가지 기본 맛에다 젓갈로 인한 단백한 맛과 발효의 훈향을 더하는, 일곱 가지 독특한 풍미를 갖춘 발효야채식품은 한국의 김치뿐이다. 이러한 김치는 지역과 기후, 계절, 각 가정의 생활환경 및 식습관에 따라 다양하게 발달 정착했다. 3. 김치의 역사우리 민족이

  • [한국 고전 시가론] 가사 속 남성상 연구
  • 비교‘새마을운동 노래’ 작사․작곡: 박정희1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 너도나도 일어나 새 마을을 가꾸세2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 푸른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다듬세3서로서로 도와서 땀흘려서 일하고 / 소득증대 힘써서 부자마을 만드세4우리모두 굳세게 싸우면서 일하고 / 일하면서 싸워서 새 조국을 만드세후렴 살기 좋은 내 마을 / 우리 힘으로 만드세위 노래는 1970년대에 조국근대화 정책의 일부로 시작된 농촌

  • 감상문 양반을 읽고
  • 과정들을 살펴보면서 재미있었던 것은 양반들의 문화가 점차적으로 사회전반에 퍼져 갔다라는 것이다. 모두 양반이 되고 싶어하는 그리고 그들이 취하는 문화생활을 따라 하려는 일반인들의 욕구를 보면서 점점 위로 수렴하려는 인간의 본성을 볼 수 있었다.우리나라에 있어서 귀족으로서 양반의 중요한 점은 양반이라는 특권계층은 유럽이나 일본의 특권계층과는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양반이라는 계층이 법제적인 절차를 통해서 형성된 것이 아

  • 구한말 이후 서북지방의 의미
  • 과정에서 내부 분열을 겪고 있었지만, 민족문제에 대한 일관된 인식을 갖고 있었다. 민족협동전선에 대한 서울계의 초기 논의는 매우 상반되어 보이는 ‘양당론’과 ‘청산론’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민족운동을 당면과제로 설정하고 있는 점은 동일하였다. 다만 청산론은 사회운동이 민족운동과 별도로 존재해서 협력하는 관계가 아니라 민족운동에 조직적으로 참여하자는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청산론은 사회주의자의 입장에서 민족독립을 우선시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 저작권 관련 사항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진실성에 대하여 레포트샵은 보증하지 아니하며,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 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됩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업자등록번호 220-06-55095 대표.신현웅 주소.서울시 서초구 방배로10길 18, 402호 대표전화.02-539-9392
    개인정보책임자.박정아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17-서울서초-1806호 이메일 help@reportshop.co.kr
    copyright (c) 2003 reoprtshop. steel All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