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편찬위원회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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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국사편찬위원회의 발자취
1. 머리말
2. 국사편찬위원회의 발자취
(1) 일제의 식민사학
(2) 국사관에서 국사편찬위원회로
(3) ‘일본의 수호신이 되라’고 부르짖은 친일관료 고원훈
3. 맺음말
참고문헌
1. 머리말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는 대한민국이 수립되면서부터 발족되었으나, 이미 해방직후인 1946년 3월 23일 국사관(國史館)이, 또한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역사의 기록과 편찬을 담당했던 춘추관(春秋館)이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는 일제에 의해 강점되었고, 그들은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라는 식민지 어용기관(御用機關)을 만들어 우리의 민족사를 왜곡(歪曲)날조(捏造)하고 사료를 약탈하는 등의 일을 서슴지 않고 자행하였다.
이처럼 일제가 왜곡한 한국사관의 해독(害毒)으로 인해 조국이 광복된 이후에도 우리는 올바른 민족사관(民族史觀)의 정립에 매우 힘이 들었다. 따라서 지금까지도 식민사관(植民史觀)이니, 민족사관(民族史觀)이니 하는 말이 우리들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역사가 과거를 통해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예견하는 힘을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국사편찬위원회가 걸어 나가야 할 길은 무엇이고, 춘추관 이후의 지나간 발자취들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2. 국사편찬위원회의 발자취
(1) 일제의 식민사학
일본인들의 한국사 연구는 일본의 한국침략을 정당화하거나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일제의 식민통치의 자료로서 당국에 의해 대대적인 지원을 받아가며 진행되었다. 강점 전의 일본인의 한국사 연구는 아직 개별적인 차원에 머무는 것이었으나, 강점 후 일본은 총독부 내의 취조국(取調局)과 중추원(中樞院)에서 식민통치의 자료로서 조선의 관습제도법률역사에 대하여 대대적으로 조사사업을 벌였다. 그 이전에 그들은 이미 대륙진출의 교두보로서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洲鐵道株式會社)를 설립하고 그 안에 만주역사지리연구실(滿洲歷史地理硏究室)을 동경제대 내에 설치하고 만주와 조선의 역사와 지리에 대하여 연구하기 시작했다. 거기서 산출된 어용사관이 다름 아닌 만선사관이다.
1914년에 박은식(朴殷植)의 《한국통사》가 일제에 준 충격은 매우 컸다. 이를 계기로 그들은 반도사편찬위원회(半島史編纂委員會)를 대폭 확대, 개편하여 총독부의 정무총감이 회장이 되는 조선사편찬위원회(朝鮮史編纂委員會),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로 발전하였다. 한편 국내의 민족주의자들의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저지하기 위하여 설치된 경성제대에 근대교육을 받은 다수의 교수진이 충원됨으로서 그들에 의해서도 본격적인 한국사 연구가 시도되었다. 또한 강점 이전부터 한국에 들어와 일제의 한국병합에 복무하던 양인출신들이나 저널리스트들의 한국사서술도 일제의 한국병합을 찬양하거나 식민통치의 여론적 향도로서 재생산되고 있었다.
1) 중추원
조선총독부 관제 및 동 중추원 관제에 의해 1910년 10월 1일 개설된 총독자문기관으로, 본래 조선 말기 정치개혁에 대한 상응적인 조처로 대두되었다. 1894년 6월 28일의 중앙관제 대개혁을 위해 마련된 의정부의 신관제안(新官制案) 속에 중추원에 관한 규정이 포함되어 있으며, 1895년 3월 1일 중추원 관제가 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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