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 - 생애 & 추천과 동양적 시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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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芝薰 조지훈
1. 생애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동에서 한양 조씨 헌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동탁(東卓)이고 지훈은 그의 아호이다. 조선 말기 대간을 지낸 조부 인석과 한방의 명의인 부친 헌영은 한학의 대가였다. 3백여 년간 전통적인 유학의 가통을 이어온 한양 조씨 집안에서 지훈이 조부에게 한학을 배운 것은 후일 그가 전통 지향의 시를 쓰고, 우리의 고전과 전통 문화를 연구하게 된 기반을 이룬다.
조지훈은 1925년부터 1928년까지 조부로부터 한문을 배우다가 영양보통학교에 다녔고, 1929년에 처음으로 동요를 지었으며, 메테를링크의 「파랑새」, 베리의 「피터팬」,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등을 읽었다. 이 때의 문학적인 감동이 1931년 마을 소년들을 중심으로 「꽃탑」이란 문집을 꾸며 내게 했고, 형인 동진과 소년회를 조직하게 했을 것이다. 16세 때인 1936년에 상경하여 조선어학회에 출입하면서 민족 문화에 관한 학술 서적을 읽었다. 독학으로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혜화전문학교에 입학한 것도 이 시절이다. 이때 보들레르, 오스카와일드, 도스토예프스키, 플로베르를 읽었으며 「춘일」등을 썼다.
1936년 동아일보의 일장기 사건이 일어난 이 시기에 지훈은 애국투사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선생의 장례식에 그의 부친과 함께 참석했으며, 만해(萬海) 한용운 선생과 노작(露雀) 홍사용 선생을 찾아가고, 지사 황매천(黃梅泉) 선생을 우러러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그의 행동적 이면에는 조국을 잃은 민족적 울분과 슬픔을 달래고 조국의 국권회복을 염원하는 민족의식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정하의 학교 교육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중학 과정을 통시강의록으로 독학, 전문학교 입학 자격 검정 시험에 합격하여 혜화전문학교(東國大學의 前身)에 입학, 문과를 졸업하였다. 1939년, 19세에 문장(文章)지에 3번의 추천을 받고 문단에 데뷔 그가 19세 되던 1939년 4월에는 「문장」지 3호에 ‘고풍 의상’으로 정지용의 첫 추천을, 12월 11호에 ‘승무(僧舞)’로 2회 추천을 받았다. 또, 1939년 7월 문예동인지 「백지」 「백지」는 1939년에 창간하여 3집까지 발간된 순문예동인지. 발행인은 최익연이고, 김해진과 조동탁이 사실상의 편집인이었다. 지훈은 그 창간호에 ‘계산표’, ‘귀곡지’, ‘우림령’을, 제2호에는 ‘공작’, ‘부시’를, 3호에는 ‘진단서’, ‘남경충’을 실었음.
의 편집에 참여하면서 시 ‘계산표’, ‘귀곡지’, ‘우림령’ 등을 발표했다. 그가 1940년 2월 「문장」지 제 13호에 마지막 추천으로 데뷔한 작품은 ‘봉황수’와 ‘향문’이었다.
하였고 1941년 3월에 혜화전문을 마치자 돌연 오대산 월정사에 입산하면서 불전강사생활을 했다. 이 즈음 대덕 방한암 스님의 도상(道相)을 입고 수행하며 지낸 선방 참선하는 방
생활은 그의 시관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22세 때인 1942년 3월에는 조선 어학회의 「큰사전」편찬원으로 일하면서 학문 연구를 시작하였으며, 그해 10월 조선 어학회 사건으로 심문을 받았고, 경주에서 목월과 처음 만났다.
해방이 되자 지훈은 「한글」지 속간호 편집에 가담했고, 국어·국사 교과서 편찬원으로 일을 했다. 또한 조선 문화 건설 협의회 회원, 명륜 전문 학교 강사, 경기 여고 교사, 전국 문필가 협회 중앙 위원, 청년 문학가 협회 고전 문학부장, 서울 여의전 교수를 지냈다.
이후 전국 문화 단체 총연합회 창립위원(47), 한국 문필가 협회 창립 위원(49), 문총 구국대 기획 위원장(50)을 지냈다. 6·25 때는 문총 구국대를 창설하고 평양까지 종군하였으며, 한국 교수 협의회 중앙 위원(60), 고려대 부설 민족 문화 연구소 초대 소창(63)으로서 「한국 문화사 대계」 전6권의 기획, 발행을 주선했고, <한국 민족 운동사>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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