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어학 역사적 인간과 시詩적 인간 -민족 문화론의 창조적 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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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인간과 시(詩)적 인간
-민족 문화론의 창조적 지평-
1. 서론 : 민족 문학론의 현황
최근의 민족문학 논의는 다시금 어떤 고비에 접어든 느낌이다. 물론 정부가 후원하는 ‘민족문학’사업들 덕분에 ‘민족문학’의 이름 자체는 그 어느 때 보다 거리낌 없이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민족문학을 위해 말 깨나 해줄 만한 일꾼들이 토론의 현장에서 멀어져 갔는가 하면, 남은 사람들도 ‘민족문학’의 개념을 좀 내용 있게 만들어 보려고 했을 때 결코 곱지 않은 눈으로 보는 이가 많았다.
그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민족문학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중단되지 않았다. 60년대 후반 이래의 여러 논쟁들을 한 차례 치르고 난 평단에서는 비편의 시각과 유형들이 얼마간 정돈이 된 느낌이며, ‘참여문학’, ‘리얼리즘문학’, ‘민족문학’ 등의 중요한 개념에 대한 기초적인 규명작업이 일단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이 때 우리는 종래의 성과를 토대로 민족문학의 논의의 새로운 지평을 향해 다시 한 걸음을 내디뎌야 할 때이다.
단기적인 전망의 문제를 떠나서, 민족문학론에 대한 오해와 반발이 쉽사리 없어지지 않으리라는 것만은 단언해도 좋을 것이다. 인간의 장래를 크게 보고 길게 볼 때는 우리의 생각이야말로 역사의 대세와 일치된다고 확신하지만, 당장 이 세계를 휩쓸고 있는 조류는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이 점을 바로 깨닫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요구되는 민족의식의 중요한 일부로서, 이 글에서도 그 점에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민족문학론에 대해 가장 흔히 가해지는 비판은 그것이 예술보다 이념을 앞세운 독단적 폐쇄적인 문학관이며, 도식적이고 경직된 사고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실상 이러한 비판이 그처럼 흔한 원인의 큰 부분이 민족문학론 자체의 미숙성과 그로 인한 도식주의 또는 독단주의의 사례에 있음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지만, 똑같은 비판을 거듭거듭 듣노라면 슬그머니 반발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민족현실의 명백한 요구보다도 외국의 어떤 학설(=도식)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 일이 과연 덜 도식적이란 말인가? 또 현실 자체가 명백하지만은 않고 복잡애매하기도 한 것이 사실이지만, 명백한 것마저 도식 속에 끌어 넣을 필요는 무엇인가?
이런 식으로 대꾸를 하자면 이쪽도 할 말이 많다. 하지만 그러한 말대꾸만으로 우리가 바라는 민족문학론의 새로운 지평이 열릴 수는 없다. 민족문학을 말하는 사람들이 민족의 당면 역사는 물론, 문학 자체에 대해 보다 깊은 통찰을 보여주고 독자와 작가를 위해 보다 절실하게 예술을 이해하며 옹호해줄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작업이 민족사의 당면과제에 대한 인식과도 상통한다는 것이 이 글의 주장이다. 편의상 여기서는 주로 이론적인 문제의 검토에 치중할 것인바, 그에 따른 허다한 외국학설의 인용과 분석은 일부 독자에게 소외감을 줄는지도 모른다. 이는 하나의 역설이며, 이것 역시 문화적 식민지 현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민족문학을 둘러싼 오늘날 한국문단의 혼란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서는 필요한 작업임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서양이론들에 대해 우리 나름으로 시비를 가리는 일을 좀 더 담담하고 범상하게 내낼 때도 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2. 현실과 작품 : 형식과 내용의 문제 재론
⑴ 민족문학론에 대한 주된 비판의 하나는 ‘소재주의’ 내지 ‘내용주의’ 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민족문학론자는 ‘형식주의자’ 요, ‘예술지상주의자’ 라고 반발하기도 한다. 민족문학에서 강조하는 역사의식이 형식의 문제에 대해서도 보다 전진적이고 독창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지 못하는 한, 우리의 민족문학론은 그 맡겨진 사명을 다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민족문학론의 ‘내용주의’를 비판하는 평자들 가운데도 스스로 ‘형식주의’ 또는 ‘예술지상주의’를 표방하는 이는 많지 않고, 오히려 이러한 개념을 ‘내용주의’ 못지않게 낡은 것으로 배격하는 수가 많은데, 이는 최근 프랑스의 신비평에서 강조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또 구조주의비평의 우두머리격인 롤랑 바르뜨는 “작가의 영역은 글 쓰는 것 자체일 뿐이다. - 예술지상주의적인 심미주의자가 생각하는 순수한 ‘형식’으로서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근원적인 뜻에서, 글 쓰는 사람에게 유일한 ‘공간(espace)’ 으로서 말이다.” 라고 하면서 그의 입장을 ‘유아론(唯我論)’, ‘형식주의’ 또는 ‘과학주의’ 그 어느 것으로도 오해해서는 안된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러한 주장이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검토가 필요하지만, ‘내용이냐 형식이냐’는 식의 양분법이 이미 낡은 것임을 명시한 것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진전이다. 크건 작건 하나의 진전이 있는 것이 사실인 한, 문학을 아끼는 입장에서는 그것을 가급적 소화하려고 애써야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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