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아 변선환의 생애와 사상 변선환 생애 변선환 사상 변선환 조사 변선환 연구 변선환 분석 변선환 인물소개 변선환 인물조사 변선환 인물분석 변선환 인물 소개 변선환 인물 조사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15.03.29 / 2015.03.29
  • 14페이지 / fileicon hwp (아래아한글2002)
  • 평가한 분이 없습니다. (구매금액의 3%지급)
  • 1,600원
다운로드장바구니
Naver Naver로그인 Kakao Kakao로그인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이전큰이미지 다음큰이미지
본문내용
일아(一雅) 변선환의 생애와 사상
들어가는 말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입학한 대부분의 학우들은 변선환이라는 이름에 대하여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는 감신대의 토착화 신학 전통을 이어 동양인의 시각에서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관계성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대화하고자 노력하였다. 학문성의 다양화와 자유를 추구하는 감리교신학대학에서 그의 사상은 감리교 신학을 좀 더 다양한 길을 탐구 할 수 있는 보다 넓은 기회로 다가왔다. 타종교(불교)와 대화의 시도는 우리의 사유를 확장시켜 줄 수 있었지만 정치적 싸움과 신학함의 방향성으로 인한 사상의 차이로 92년도 5월 7일 종교재판으로 그는 출교를 당했고, 그 시대에 많은 이슈를 낳았다. 그 사건이 역사의 흐름으로 점점 잊혀져가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 시간을 통해 우리 스승이신 변선환 학장님에 대한 오해와 편견의 안개를 걷고 그의 참되고 솔직한 신학함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우리 후학들은 무엇이 옳은 길인가에 대해 스스로 질문해 보고 진리의 길로 좀 더 다가가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1. 92년 감리교 종교 재판의 과정과 결말
<변, 홍교수 사건(1991)>
1982년 이후 감리교회 안에서 이단 시비가 다시 불붙게 된 것은 1991년이다. 1990년 감신대 변선환 학장이 ‘불타와. 그리스도’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이 글에 나타난 변선환 교수의 다원주의 신학과 홍정수 교수의 포스트모던 신학에 대해서 교리수호대책위원회로 대표되는 부흥사들은 “이단사상”내지는 “기독교 신앙과 감리교 교리에 배치되는 신학사상”으로 “선교에 특히, 7천 교회 2백만 성도 확장운동에 막대한 장애요인”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이 총회차원에서도 받아들여져 결국 두 교수는 출교처분을 받았다 이 사건은 진행되는 과정에서 공정성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고 ‘교단 정치의 싸움으로 전락되었다’는 비판을 받을 만큼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교회와 신학의 관계를 재검토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즉 신학은 교회선교에 봉사하는 학문일 뿐만 아니라 교회 자체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한국감리교회의 신학은 한국감리교회의 정체성을 규명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불분명할 때 교회는 그 선교의 방향에 혼란이 오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 사건은 두 가지 성격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이 사건은 교회의 양적 성장만을 추구해온 부흥사들의 신학적 한계를 드러내 주었다. ‘복음주의 신학이 감리교회의 신학이며, 다른 신학은 신앙을 파괴하는 신학’이라는 그들의 신학적 입장은 철저하게 비감리교적인 것이다. 물론 감리교신학은 복음주의도 포괄한다. 그러나 다른 신학에 대해 배타적이지 않다. 오히려 한국 감리교회의 신학적 특성은 개방성과 포용성 그리고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추구해 왔다. 이것은 한국감리교회가 그 교리적 선언에 보수적 근본주의의 5원칙 삽입을 거부한 것과 장로교와는 달리 감리교는 지금까지 한 번도 신학적 입장 차이로 분열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로도 미루어 볼 수 있다. 한 이들은 교회와 신학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곽전태 목사의 글은 이를 잘 나타내 준다.
“교단의 신학대학은 비유컨대 국가의 사관학교와 같습니다. 국방의 간성들을 길러내는 사관학교가 국시에 위배되는 것을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교단에 소속된 신학교도 교단을 섬겨가고 목회자 양성에 중점을 두면서 학문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학교는 교단이 요구하는 방향으로 교육하도록 노력하며....”
이것은 신학이 교회에 봉사하는 학문이어야 한다는 한쪽의 기능만을 주장한 것으로써 신학의 또 다른 기능 즉 교회의 정체성을 규명하고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기능을 간과하고 있다.
둘째로, 이 사건은 지금까지 한국감리교회의 신학을 이끌어 온 감리교신학대학의 신학이 교회와 유리되어 발전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감신대는 감리교의 학문적 전통을 잘 살려서 토착화 신학으로 대별되는 여러 가지 선교 신학적 접근을 시도해 와KT다. 이러한 접근은 ‘하나님 선교’라는 신학적 근거위에서 교회의 정체성을 규명하고 선교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신학이 교회라는 현장과 밀착되지 않고 학문 중심적으로 진행되어 왔다는 점에서 한계성을 갖는다.
<종교재판의 과정과 결말>
70~80년대 감리교 내의 부흥운동이 급속도로 성장하는 가운데 90년대에 이르러 감리교의 부흥단 세력은 하나의 써클로서 정치 세력화를 이룬다. 이러한 부흥사들을 중심으로 하여 교리수호라는 명목 하에서 신학교의 교수들에 대한 공격이 본격화 된다. 91년 김홍도 목사, 유상렬 장로, 박기창 목사, 배동윤 목사 등은 감신대 변선환 학장의 종교다원주의 신학과 홍정수 교수의 포스트모던 신학을 문제 삼아 《교리수호대책위훤회》를 조직하고 공동회장으로 김홍도 목사와 유상렬 장로를 선출하여 교리수호 운동을 펴 나갔으며, 이것은 결국 감리교 역사상 처음으로 있는 종교재판으로까지 나아갔다.
자료평가
    아직 평가한 내용이 없습니다.
회원 추천자료
  • [고전문학연구] 시대를 앞선 연암 박지원 - 학문, 문학
  • 일 부자였던 변씨에게 돈을 빌리게 되고 매점매석으로 떼돈을 벌게 된 다. 빈 섬을 찾아 이상국으로 만들고, 도적들을 모아 거기에서 살게 한다. 변씨와 벗이 된다.#위기 : 허생의 위엄을 듣고 찾아온 이완에게 허생은 대응책을 제시한다.#절정ㆍ결말 : 사대부들의 허위의식을 비판하는 말을 남기고는 사라진다. 그 후로 허생은 보이지 않는다. 에 나타난 시대상에 등장하는 이완은 역사상 실존인물로, 이완의 생애를 통해 허생전

  • [신비주의 연구] 이용도와 신비주의(이용도 신비주의, 이용도 신앙)
  • 연구”,제20집 1968.9라 부르든, “십자가 신비주의” 윤성범, “이용도와 십자가 신비주의”, “아가서적 요한적 신비주의” 변선환, “이용도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제25집, “열광적 신비주의” 유동식, “이용도 모사와 그의 주변”1967.7, “동양적 신비주의” 성백걸, “이용도 생애와 사상”, 「이용도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 논문집 : 이용도의 생애. 신학. 영성」 한들출판사. 2001 , “고난

  • 연암 박지원의 삶과 문학
  • 연구는 지난 1960, 70년대에 실학 연구가 활발하게 일어나면서부터 비로소 본격화되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실로 왕성한 연구가 이루어져온 결과 연암의 문학과 사상은 상당한 정도로 규명되었다. 따라서 연암을 그 시대의 인물로 재현하는데 주력하여 파악해 보기로 한다.2. 박지원의 생애와 교우관 2.1. 생애박지원(1737~1805)은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실학자다.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자는 미중(美仲), 중미(仲美), 미재(美齋)이며, 호는 연암(燕巖), 연

  • 독립운동사 연구동향 비평 -김구(1876-1949)를 중심으로
  • 일제 치하의 혼란스러웠던 시기를 모두 겪었던 김구는 그의 모든 생애를 혼란 속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해 바쳤다. 수많은 연구자들이 그의 업적과 리더십, 성품, 생애 등 많은 분야를 연구하였고, 그 연구들로 인해 사람들은 더욱 김구를 존경하고 본받을만한 인물로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역사연구자들은 어떠한 사건이나 인물을 연구할 때 각기 다른 관점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해 왔다. 각 연구자가 가지고 있는 사상이나 가치, 자료를 보는 시각 등

  • [역사학] 소설 `상록수`속 시대와 계몽운동 연구
  • 소개로 신채호와 며칠을 함께 보낸 일이나 이회영에게서 오랜 시간 자애로운 교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에는 무엇보다 종친의 딸과 혼인할 정도의 배경을 지녔던 청송 심씨의 후광이 있었다. 최원식,「심훈연구서설」,『한국근대문학을 찾아서』, 인하대 출판부, 1999, 242쪽.그러나 심훈이 우당(이회영)과 단재(신채호)를 향해 움직였다는 것을 세교의 산물로만 이해할 수는 없다. 민족운동에서 출발해 무정부주의에 도달했던 두 사람의 사상적 궤적이야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 최근 판매 자료
    저작권 관련 사항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진실성에 대하여 레포트샵은 보증하지 아니하며,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 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됩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업자등록번호 220-06-55095 대표.신현웅 주소.서울시 서초구 방배로10길 18, 402호 대표전화.02-539-9392
    개인정보책임자.박정아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17-서울서초-1806호 이메일 help@reportshop.co.kr
    copyright (c) 2003 reoprtshop. steel All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