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요약][한국사] 로일의 대립과 민비 시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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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문
Ⅱ.삼국간섭과 일본의 대응
Ⅲ. 일본의 간섭극복과 민비의 인아거일책
Ⅳ.정상형의 시해주도와 일본각의의 임시 의회 불개최결정
Ⅴ. 결어
본문내용
1. 서문

1895년 10월 8일 민비를 시해하였다. 우리의 연구는 대원군․훈련대 주모 설을 부정하는 데만 여념이 없었다. 이는 사건 직후 일본 정부가 관련 자료의 인멸 왜곡과 함께 모든 관련자에게 함구령을 내려 사건의 진상 규명을 방해한 데 일차적 원인이 있다. 심지어 그들은 내각의 승인을 받아 외국 특파원을 매수하기도 하고 외교 챤넬을 동원, 일본정부의 무관함을 변호하기도 했다. 또한 우리 연구자들 또한 대원군․훈련대 주모 설을 내세운 일본의 간계에 흥분하여 이를 부정하는 데 열중함으로써 미우라 주모를 강조하게 됨으로써 결국 사건을 미우라 개인 차원의 것으로 발뺌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여기서는 일본이 민비를 시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국제 환경부터 분석한다. 또 정상형가 대한정략으로서 왕비‘회유’와 왕비 ‘제거’라는 兩案을 제기해 놓고 국제정황의 변화를 일본 내각으로 하여금 후자를 택하도록 주도한 장본인이었음을 입증하고자 한다. 아울러 그가 일본 정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미루어 일본정부의 관련성을 실증한다.
왕비 시해 결정과 같은 중대 문제는 당초 미우라 따위가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일본 각의도 국제정화의 변화가 있고 나서야 비로소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Ⅱ.三國干涉과 일본의 對應

일본은 청일강화조약(1895. 4. 17)으로 청일전쟁의 도발의 목적이 한반도에서의 영향력 확보를 넘어서 청국 분할에 있다는 야욕을 드러내었다. 이는 유럽열강을 당혹케 했다. 특히 제 2회 각료회의(1895. 2. 1)의 결정에 따라 일본의 요동 반도 점령이 자국의 이행를 정면으로 침해하는 것으로 여긴 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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