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 조선의 자주독립 문제와 독립신문의 대응 -한글판과 영문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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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조선의 자주독립 문제와 독립신문의 대응
-한글판과 영문판을 통한 이중 대응-
-목차-
서론
1. 자주독립 문제에 관한 이중적 여론 조성
2. 이중적 논조의 목적: 개혁과 세력균형 통한 자주독립국의 실현
결론
서론
1896년 4월 발간된 『독립신문』은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한글신문으로서 대중들에게 근대 개혁의 비전을 전파하고, 개화세력의 정치사회적 입지를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독립신문』이 발간될 당시 조선은 국권이 실추된 상황이었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민비시해 및 아관파천을 겪으면서, 조선은 훼손된 국위를 회복하고 자주권 확립의 문제가 선결되어야 했다. 청일전쟁 이후, 제국주의 질서의 논리에 따라 조선은 ‘독립국’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상에 불과했으며, 실질적으로 제국주의 국가들은 조선의 자주와 독립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걸며 약소국 조선의 자주권을 침해했다. 한편 조선의 대내외적 위기는 조선의 정부 관료와 일반민들에게 국권과 자주에 대한 인식을 확대시켜 나갔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독립신문』은 실질적인 ‘자주독립국’을 건설하기 위한 여론을 형성해 나갔다. 대내적으로는 개화(개혁)를 추진하고, 대외적으로는 세력균형에 의한 독립을 보존한다는 개혁론의 전파였다. 『독립신문』 편집인들은 개화를 통해서만이 진정한 자주독립국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한글판에서 ‘조선이 독립이 되었다’ 고 하면서, 다른 경우에는 ‘조선이 독립이 되려면’이라는 모순된 표현이 나오는 것은 바로 실질적 측면에서 자주독립국을 만들자는 의미였다. 『독립신문』에는 독립국, 자주독립국, 독립권, 자주독립의 권리라는 용어가 전 시기를 통해 나타난다. 대체적으로 독립국의 의미는 屬國의 반대를 의미한다. 자주독립국이란 속국의 반대 개념인 독립과 더불어 간섭의 반대인 자주의 의미가 포함된다.
이와 같이, 『독립신문』은 자주독립국의 비전을 전파하면서 일반대중과 재조선 서양인들의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기존 연구들은 대개 독립협회와 문명개화론자들의 정치사회사상과 개혁론을 살펴보는 자료로서 『독립신문』을 주목했다. 柳永烈,, 『開化期 尹致昊 硏究』, 高麗大學校 大學院 博士學位論文, 1984 ; 愼鏞廈, 『獨立協會硏究-獨立新聞獨立協會萬民共同會의 思想과 運動-』, 一潮閣, 1985 ; 朱鎭五, 『19세기 후반 開化 改革論의 構造와 展開-獨立協會를 中心으로-』, 延世大學校 博士學位論文, 1995 ; 韓哲昊, 『親美開化派硏究』, 國學資料院, 1998 ; 金度亨, 『大韓帝國期의 政治思想硏究』, 지식산업사, 2000 ; 白東鉉, 『大韓帝國期 民族意識과 國家構想』, 高麗大學校 大學院 博士學位論文, 2004.
또한 『독립신문』은 한글판과 영문판이 동시에 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 연구는 한글판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으며, 한글판과 영문판의 내용 차이에 대해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한글판과 영문판은 각기 다른 독자를 대상으로 발간되고 있었다. 한글판이 조선의 식자층과 대중을 대상으로 했다면, 영문판은 주로 조선에 있는 서양인을 대상으로 했다. 다른 독자층을 겨냥한 두 신문은, 논설과 기사 내용에서는 물론이고, 여론 조성의 방향에 있어서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독립신문』의 주필자들이 한글판과 영문판 모두를 주관한 내용에서 차이가 난다는 것은 『독립신문』 편집인들이 ‘목적의식’ 하에서 여론을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아관파천기(1896. 4~1897. 2) 『독립신문』 한글판과 영문판이 조선이 당면한 자주독립 문제에 대해 상반된 여론을 조성한 내용을 확인하고, 이를 통해 그들의 목적의식 하에 이루어지는 여론화 활동의 성격을 구명하고자 한다. 이 시기는 서재필이 한글판과 영문판의 주필로 활동하였으며, 한글판 助筆로는 주시경이, 영문판 助手로는 헐버트가 참여하였다. 창간호부터 1898년 5월 10일까지는 서재필 혼자서 제작했다. 1898년 5월 이후 미국선교사 아펜젤러(阿扁雪羅H.G.Appenzeller)가 명의상 사장이 되고, 윤치호가 제작실무 겸 주필이 되었다. 그러나 독립협회 사건으로 윤치호가 신문사를 떠나자 1898년 12월 29일자를 끝으로 휴간했다. 1899년 6월부터는 영국선교사 엠벌리(音法里H.Emberley)가 사장 겸 주필이 된 후, 다시 1899년 6월 9일자로 복간되어 주간으로 9월 1일까지 나오다가 격주 간으로 변경된 후 9월 14일자를 끝으로 폐간하였다.
1. 자주독립 문제에 관한 이중적 여론 조성
1895년 민비시해와 단발령의 강행은 각 지방에서 반일의병운동을 촉발시켰으며, 1896년 2월 俄館播遷의 계기를 제공했다. 韓哲昊, 앞의 책, pp.125~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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