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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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두 겹의 계몽 구조
이기영이 태어난 것은 을미사변이 일어나기 세달 전 이었다. 이기영은 덕수 이씨로 충무공 이순신의 12대손이다. 양반 집안 출신임에도 이기영은 민촌(民村)이란 호를 지어가졌다. 양반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반촌(班村), 상민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민촌이라 한다. 근대 이전의 한국 사회를 지배한 것 중의 하나는 ‘양반-중인-평민(상민)-천민’의 네 위계로 이루어진 엄혹한 신분 질서였다. 이 같은 신분 질서는 1894년 갑오갱장으로 공식 해체되었고 현실적 영향력도 약화된 때였으므로 이기영의 호는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모든 부면에서 소외된 가난하고 힘없는 계층을 상징한다. 또한 그 계층의 편에 서서 그 같은 소외의 현실을 타개하여 바람직한 세상을 이루고자 하는 이기영의 개혁의지를 상징한다. 이기영은 문학으로서 ‘민촌’의 이 같은 상징 의미를 실현하고자 평생 고투하였다.
이기영은 소작농들의 비참한 생황을 사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우리 소설사의 새로운 단계를 연 작가이다.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 현진건의 「빈처」등이 대표하는 청년 지식인들의 고뇌를 주로 문제 삼았던 직전 단계의 소설과는 달리 하층민의 삶을 탐구, 구체적으로 형상화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 간도 조선인들의 죽음에 직결된 삶을 생생하게 그려 낸 ‘최서해적 경향’ 즉 최서해의 문학과 동질적이다. 객관 현실을 구체적으로 반영하는 이 같은 경향은 박래(舶來)한 사상에 기대어 작가의 이념을 지식인의 독백이나 대화 또는 우화를 통해 제시하는 추상적 관념적 경향, 이른바 ‘박영희적 경향’과 대척적인 자라에 놓인다. 이 같은 두 경향이 현실 변혁의 지향이란 동질성을 매개로 합치게 되는데 1925년의 카프 결성이 그것이다.
이기영의 문학은 토지 소유관계를 중점적으로 문제 삼았다는 점, 계몽성의 요체가 농민과 마찬가지 처지에 있는 계몽자와 농민들이 자신들의 현실을 타개해 나가는 실천의 과정이라는 것, 농촌 현실과 농민들의 삶을 깊이 탐구하여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였다는 점 등에서 이광수의 「흙」, 심훈의 「상록수」, 이무영의 「모범경작생」등과는 전혀 다르다. 이 같은 이기영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 《조선일보》에 연재(1933.11.15~1934.9.21)되었던 이기영의 장편소설『고향』이다.
모두 38개의 소단락으로 구성된 『고향』의 주요인물과 기본구조는 맨 첫 단락인 ‘농촌점경’에 뚜렷이 제시되어 있다. 마름 안승학으로 대표된 수탈층의 유한한 생활과 권력에의 유착, 엄청난 노동에도 불구하고 희생당해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농민들의 참담한 생활이 마주보고 선 가운데, 동경 유학생 출신 김희준이 등장한 것이다. 작품 전개와 함께 김희준은 계몽자로 부상, ‘계몽자-소작 농민’의 계몽 관계를 품은 농촌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의 대립 구조가 성립하게 된다.
이 작품의 기본 구조는 지주와 지주를 대리하여 소작을 관리하는 마름과 소작 농민들이 이루는 토지 소유관계이다. 농민들을 옥죄는 수탈 구조는 이 같은 토지 소유관계뿐만이 아니다. 식민지적 경제 질서가 겹쳐 있으니 이중의 수탈 구조인 것이다. 이런 이중의 수탈 구조 가운데에 주인공 김희준이 뛰어들었다.
주인공은, 세상 이치에 어두운 농민들을 계몽하여 그 같은 수탈 구조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인식으로 독자를 이끌어 간다. 이 같은 계몽구조는 ‘작가-작품-독자’의 계몽 구조와 겹쳐지는데, 우리 소설사의 지배적인 형식의 하나는 바로 이 이중의 계몽 구조이다. 소설을 현실 타개의 수단으로 인식했던 우리 사회의 오래된 전통하나를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고향』의 김희준은 몰락한 중간층 출신으로 동경 유학을 거친 뒤 귀국, 한갓 소작농의 처지에서, 마찬가지 처지에 놓인 농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을 계몽하는, 객관 현실 한복판에 서 있는 인물이다. 또한 그는 지나치게 완전한 이념적 인물로서 도식화되어 있는 다른 인물들과는 다르다. 그는 농민의 의식을 깨우치고자 노력하는 계몽적 인물이지만, 그들이 보수성과 숙명론적 인생관, 소(小) 소유자적 이기주의에 부딪혀 좌절하기도 하며, 자신의 불행한 조혼과 연애 문제로 격심한 내면 갈등을 겪기도 하고, 자신 속에 은밀히 도사린 인텔리 근성과 소시민적 패배주의를 극복하고자 끊임없는 자기비판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고뇌하는, 살아 발전하는 인물이다.
중요한 것은, 주인공의 좌절과 방황, 자신의 유약함을 자기비판하는 모습들을 왜곡하지 않고 그려 내었다는 사실이다. 경향소설에서는 전혀 새로운 양상인데 『고향』에 이르러 경향소설은 비로소 대상의 이념화·고정화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고향』의 농민들이 문제적 인물인 희준의 계몽 대상으로만 그치는 단지 무식한 존재가 아니라 때로는 그의 잘못된 허위의식을 깨우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김선달은 유복한 집 자식들의 심심풀이에 불과한 청년회를 비판하는데, 희준은 이에 깨달아 자신의 자세를 가다듬으며, 내부의 허위의식, 곧 인텔리적 시혜 의식을 통렬히 비판하기에 이른다. 문제적 인물과 소작 농민 사이의 계몽 관계가 그 도식성에서 벗어나 구체성과 탄력성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작가의 이념을 그대로 전달하는 도식화된 메가폰 같은 존재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현실적 존재인 김희준은 계몽자이면서 동시에 객관 현실의 소설 내 반영의 매개자인 것인데, 이로써 그의 여로와 함께 객관 현실의 전체성이 과거·현재·미래를 잇는 ‘구체적 시간성’위에 놓이게 된다. 그의 이념적 지향은 강렬한 것이지만 그의 여행을 통해 발견되고 드러나는, 그리하여 작품 속에 구체적으로 형상화되는 객관 현실에 내재한 지향성에 의해 뒷받침 받는 현실적인 성격의 것이기에 그러하다. 이념 지향과 현실 사이의 변증법적 상호 관련이 긴밀할수록 시간성의 긴장 정도가 증대되는데 『고향』은 긴장의 가능한 최대치를 확보한 것으로 판단된다.
귀향의 형식, 실천적 투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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