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친아트 이야기] 경동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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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아트 이야기
경동산업은 당시 대기업이었던 삼환그룹의 계열사로, 1960년 국내 최초로 양식기 공장을 영등포에 설립하여 직원 수 7천여 명, 연간 매출 1천억 원 대에 이르는 큰 규모로 성장한 회사였다. 당시 양식기 산업은 전형적인 노동집약적인 산업이었으며, 생산원가 중 인건비 비중이 30퍼센트를 넘을 만큼 노동력에 의존했다. 국내 업체들은 값싼 인건비에 힘입어 중급품 위주로 생산해 유럽과 미국에 전체 생산량의 85퍼센트를 수출했다. 당시로서 흔치 않게 독일과 미국에 지사가 설립돼 있었기에 지사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현지의 가정주부들이 몇 배나 더 비싼 가격을 주고서라도 브랜드 있는 제품을 구매하는 것을 눈여겨봤고, 키친아트 브랜드를 선보였다.
경동산업의 성장은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이 뒷받침 된 결과였다. 야근과 철야는 반강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근로자들은 휴일에도 무보수로 일해야 했다. 민주화의 바람이 불면서 임금이 오르자 경동산업의 가격경쟁력도 떨어졌다. 회사는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 인도네시아에 공장을 세우고 국내 공장의 직원의 수를 줄였다.
회사 안의 노조는 임금협상안을 체결할 때도 직원들의 요구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금액에 덜컥 회사와 합의하는 등 근로자의 권익을 대변하는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직원들이 ‘디딤돌’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사태의 해명을 촉구했으나 회사는 오히려 이들을 사규위반으로 회사 징계위원회에 회부했다. 오늘날 키친아트를 만드는 데 큰 일조를 했던 박선태와 초대 회장직을 맡은 최순택이 바로 이 ‘디딤돌’의 주축이었다. 이 와중에 노사관계는 점차 파국으로 치달아 근로자 강현중 씨 등 5명이 회사 이사실 입구에서 온몸에 시너를 뿌린 채 이사에게 징계방침 철회를 요구하기에 이르렀고, 거절당하자 몸에 불을 붙여 온몸에 중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다. 회사가 직언을 배려하지 않았고, 직원도 회사의 경영상태를 외면한 채 무리한 요구를 했다는 비판이 사회적으로 일었다. 서로가 대화하고 타협해서 조금만 양보했더라면 이같이 참혹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경동산업은 이런 비극적인 사태를 겪으면서도 노사의 상생을 이끌어내지 못했으며, 시장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면서 뿌리째 흔들렸다. 93년에 회사는 자금사정 악화로 법정관리를 신청했으며, IMF가 터지자 법원은 회사의 회생가능성이 없어 정리절차 결정을 내리고 조기 퇴출 시켰다. 직원들은 파업을 통해 그동안 밀린 임금과 퇴직금을 요구했으나 경영진은 나 몰라라 내빼기에 바빴다.
분신사태 이후 해고되었다가 복직한 박선태와 당시 노조위원장이었던 최순택은 경동산업이 보유하고 있었던 키친아트 브랜드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회사를 포기하지 않고 일으킬 방법을 모색했다. 회사를 포기하면 퇴직금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 돈을 자본금 삼아 주식으로 나누어 갖고 회사를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회의감과 패배감에 빠져있는 직원들을 일일이 설득하고, 오랜 시간 갈등을 빚어온 관리직 출신 직원과 생산직 출신인 직원들이 회사를 살리자는 한 뜻으로 모여 할 수 있다는 정신으로 결의를 다졌다.
경동산업이 키친아트 브랜드를 만든 것은 순전히 수출 부진에 따른 내수 시장 공략을 위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직원들에게 브랜드 파워를 보여준 큰 계기로 작용했다. 최초로 삼중바닥 냄비를 개발해 시장에 내놓았을 때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도매업자들이 키친아트란 브랜드만 붙으면 찌그러진 냄비도 날개 돋친 듯 팔린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회사가 망하면서 브랜드 가치 역시 추락했고, 전직 경영자는 브랜드 매각을 추진했다.
직원들에게는 브랜드가 마지막 희망이었다. 당시 조흥은행은 80억을 대출해주면서 공장 터와 브랜드를 담보로 잡았다. 직원들은 은행에 브랜드의 담보를 풀어달라고 틈만 나면 본사를 찾아가 부탁도 하고 애원도 하고 때로는 협박도 했다. 결국 채권회수 담당자는 이들의 열정을 믿기로 하고 공장 터를 매각하는데 실력행사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브랜드의 담보를 풀어주었다.
이렇게 브랜드를 되찾았지만 공장과 기계가 모두 팔려나가는 바람에 더 이상 주방용품을 만들 수가 없었다. 조직을 슬림화하고 브랜드 중심으로 변신해 위기를 넘는다는 전략을 세웠고, 이와 같은 창조적인 파괴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데 큰 역할을 했다. 남아있는 주주들 가운데 젊고 도전의지가 있는 사람 중심으로 최소 정예인원을 꾸려 제품을 만들어 줄 외부 협력사를 설득했다. 6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협력사들을 찾아다니며 관계를 회복시킨 끝에, 돌아선 협력사 사장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다.
2001년 직원들이 만든 회사, 키친아트가 세상에 정식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 때 세워진 키친아트의 사훈은 ‘공동소유, 공동책임, 공동분배’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배려’인 것이다. 세 가지 모두 자기가 조금 더 양보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직원 스스로가 회사의 주인처럼 느끼고 회사도 직원을 주인처럼 대해주자는 생각에서 공동소유의 개념을 도입했다. 대주주나 지배주주 없이 288명의 주주들은 모두 주식 지분을 N분의 1만큼씩 가지고 있다. 직원은 노조조합원이 아니라 주주가 됐다. 공동 책임은 모두가 사장이고, 곧 직원이라는 뜻이다. 회사에서 문제가 생기면 모두가 책임을 나누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공동분배는 함께 열심히 일해 생긴 결실을 함께 나눈다는 뜻이다. 투명하게 성과를 공개하고 함께 나누겠다는 것이다.
주주들은 지분의 51퍼센트를 최순택 사장에게 명의 신탁했다. 이익금은 288분의 1로 분배하기로 했다. 처음에 그는 직원과 주주에게 꿈을 불어넣었고,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는 듯 했다. 그러나 그는 곧 고급승용차를 타고 월급을 1천여 만 원 이상 받는 등 회사를 마음대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또, 십여 년을 함께 조합원으로 있으면서 동고동락한 박선태를 회사에서 내보냈다. 회사는 이익을 내고 있었지만 사장은 주주에게 배당되는 돈도, 사회에 공헌할 자금을 거덜 내고 있었다. 주주들은 결국 2005년 최순택을 인천지검에 업무상 횡령죄로 고소했다. 직원들이 만든 기업에서 비리가 일어났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앞섰지만, 훗날을 위해 썩은 고름을 도려낸다는 생각이었다. 인천지역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키친아트 정상화를 위한 인천 지역 공동대책위원회’도 꾸려졌다. 결국 최순택은 구속되었고, 주총을 통해 회사의 경영진들은 투표를 통해 새로 선임되었다. 회사는 시민들에게 창립정신에 걸맞은 진정한 사회의 기업으로 거듭나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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