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펜젤러 -한국에 온 첫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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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의 생애
2. 아펜젤러의 교육적 업적
3. 아펜젤러의 교육관
4. 교육자 아펜젤러의 한국교육사적 의의
본문내용
1.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의 생애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는 1858년 2월 6일, 미국의 펜실베이아 주 서더튼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펜젤러는 그의 어머니로부터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을 읽어주는 등 철저한 성서교육을 받고 성장하였다. 아펜젤러는 1863년 다섯 살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8년 동안 공립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아펜젤러는 어학력이 대단했는데 독일어는 어머니에게서 배우기 시작하여 학교에서 완전히 배웠고 불어까지 익혔다고 한다. 그리하여 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던 중 1872년 11월 1일에 세례를 받았고, 프랭클린 마샬대학에서 고등교육을 받게 되었다. 1876년 10월 6일 웨스터체스트의 장로교회에서 봉사하던 풀턴의 설교를 듣고 회심했고 1879년 4월 활동적인 신앙생활을 위해 감리교회로 교적을 옮겼다. 1878년 프랭클린 마샬대학을 졸업하고 드루신학교에서 신학을 연구했다. 아펜젤러는 1881년 인도선교와 일본선교의 비전을 갖고 있던 중 파울러 감독의 요청으로 선교지를 한국으로 정하였다. 아펜젤러보다도 워즈워스가 먼저 한국선교사가 되려고 마음먹었으나 개인사정으로 포기하였고 이 기회를 놓칠세라 아펜젤러는1884년 12월 약혼녀 엘라 다지(Ella Dodge)와 랑카스터 제일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1885년 2월 1일 스크랜튼, 언더우드와 더불어 부산으로 출발하여 4월 2일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4월 5일 부활주일에 제물포 항구를 통하여 입국하였다. 하지만 당시 1884년 12월 4일에 일어난 갑신정변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았기 때문에 국내의 정황은 매우 불안했다. 더구나 아펜젤러 부인이 임신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들 부부는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7월 29일에야 서울에 들어올 수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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