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선교사와 한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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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선교사와 한국교회>
1. 서 론
한국교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개신교가 한반도에 발을 들어선 이후 180여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우리는 무엇이 발전하였는가? 유교가 득세를 하고, 온갖 외세문물들이 들어닥치는 19세기 말 조선시대는 혼란기였다. 그 틈을 비집고 서양 열강들 틈속에서 한줄기 빛으로 한국땅에 뿌리를 내린 개신교의 시작은 매우 험난하였다. 수많은 이국땅 교단들의 선교사들, 선교사들을 통해 들어온 근대화, 그리고 일본의 식민지배 등 여러 가지 이해관계와 하나님의 복음이 혼재되있는 속에서 개신교는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현재의 교회들은 어떠한가? 국민의 참정권이 인정되고 민주화를 이룩한 지금 (혹자는 지금 이 시간이 민주화를 역행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개신교는 끊임 없이 발전하고 있는가? 어려운 제약들이 하나 없는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성장하고 있는가? 겉으로 볼 때 한국의 개신교 놀라울 만한 성장을 이뤘다. 개신교의 시작을 알렸던 유럽의 많은 국가들은 현재 메너리즘에 빠진 탓인지 대부분의 교회가 교회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한 채 버젓이 방치되어있다. 한국은 그들에 비해 300년이나 늦게 교회가 전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세계 10대 교회중 대다수가 한국 교회일뿐더러 대한민국에서도 가장 늦게 전래된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종교 비율에서 당당히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수치인가? 하지만 진실로 수치상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일까? 현재 개신교가, 아니 교회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이 저 놀라운 발전된 수치만큼의 것들일까? 왜 현재 우리나라의 이웃종교 나 비기독교인들은 개신교를 ‘개독교’ 라고 비난하고, 목사를 ‘먹사’라며 강하게 비난하는 것일까? 그리고 교회도 왜 서로를 감싸고 나아가는 것이 아닌 서로 비난을 할 생각만 하며, 각종 이해관계가 얽힌 일이 아니면 나서지 않으려고 하고 결코 사랑이 없는 모습들을 보이고 있는 것인가?
‘한국교회는 병들었다’ 라는 표현이 자주 언급된다. 나는 ‘한국교회는 속이 빈 강정’ 이라고 말하고 싶다. 겉으로 보기엔 너무나 맛있어 보이고 꼭 한번 집어 먹어보고 싶은 강정이지만 속이 텅 비었다면 허탈하고 화가날 것이다. 현재 한국교회가 겉으로는 화려하고 훌륭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 속에는 첨예한 갈등들, 과거로부터 지우지 못한 잔재들, 왜곡된 신앙들이 가득하여 오히려 속이 빈 것만 못한 상황이다. 이 땅에 개신교가 전해진지 어언 180년. 한국교회는 왜 발전하지 못했을까? 왜 시간이 흐를수록 퇴보하고 있는 실정일까? 선교사가 이 땅위에 잘못된 신앙을 전한 것일까? 왜 교단도 다양하여 서로 갈등만 일으키는 것일까? 이 교단들은 어떻게 전래되었나? 등 다양한 이야기를 선교사가 이 땅위에 들어온 역사를 통해 이야기를 하겠다.
2. 본 론
ⅰ) 당시의 정치상황과 선교사의 활동
이 땅에 가장 첫 번째로 발을 들인 개신교 선교사는 문서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유대계 폴란드인 귀츨라프였다. 그는 1832년 충남 고대도 등 서해안 연안에서 통상 청원 및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 이후 선교를 목적으로 조선에 온 개신교 선교사는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로 “제네럴셔먼호 사건” 때 평양에서 피살되었다. 이 당시 조선의 상황은 어떠하였는가? 서양열강들은 한국에 끊임없는 문호개방을 요구하는 가운데 1866년 미국이 행했던 침략이었다. 당시 토마스 선교사는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이유로 배에 탑승하여 평양에 온것인데, 하나님의 복음 이전에 강제성을 띈 침략에 동의한 선교사가 현재 한국에서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 라고 불리고 있다. 그 후 1870년 스코트랜드 연합장로교 소속의 선교사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는 만주에서 조선인들을 만나 기독교를 전했다. 1879년부터 세례를 받은 최초의 개신교인이 된 조선인 이응찬, 백홍준, 김청송, 서상륜 등은 선교사등과 함께 성경을 번역하는 작업을 하였고 『예수성교누가복음전서』 와『예수성교요안내복음전서』를 봉천에서 간행했다. 이들 최초의 개신교인들은 목숨을 걸고 국내로 반입하였고 이것은 조선이 개항하여 미국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오던때까지 수많은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하고 개신교가 자리잡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렇듯 문호 개방전부터 한국인들이 세운 자생교회는 존재하며 전도를 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하지만 당시 교육 활동과 사회 사업들이 한국사회의 봉건적 폐습으로 인해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고 이 때문에 넓은 활동의 전도를 뻗치지 못하였다. 그리고 1883년 이수정이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부터 최초로 세례를 받은 후 조선인 유학생 사이에서 다수의 개종자가 생겨서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그는 1884년 미국의 장로교계 선교잡지에 게재된 편지에서 미국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였고, 동시에 미국성서공회의 지원 아래 그가 『신약마가전복음서언해』번역해 출간하였다. 그리고 1885년 우리가 잘 아는 최초의 목사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들어오게 되었고, 우리들만의 노력으로 자리잡고 서서히 커가고 있던 개신교의 활동은 불을 지피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당시 한국의 여러 가지 봉건적 가치관을 무너뜨려주며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을 소개하였고 한국사회와 문화의 수준을 높이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당시 한국은 온건파와 급진파의 대립으로 정치적으로 얽힌 상황이었는데,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한국의 근대화가 서둘러진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 속에서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이 나자 집권을 하게된 온건파는 무조건적인 근대화가 아닌 동도서기론적 근대화를 표방했고, 이는 선교사의 신학적 흐름과도 직결되게 되었다. 당시 한국에 들어왔던 선교사 시대의 신학적 흐름은 세가지 였는데, 첫째는 모페트와 레이놀즈, 그리고 클라크 선교사를 중심으로 한 선교사 시대의 역사적 칼빈주의의 보수신학, 둘째로 헐버트와 스코트를 중심으로 한 선교사 시대의 역사 참여적 진보주의 신학, 마지막으로 초기 선교사들과 감리교 선교사 하디를 중심으로 한 성령부흥주의 신학이었다. 그리고 정치상황과 얽혀 지배적인 신학의 흐름은 극단적인 보수주의 신학과 성령부흥주의 신학이었다.
선교사가 다양한 도움을 주었던 가운데 이들의 영향은 일제강점기까지 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이 한국에는 이미 자생교회가 있었으나 정치적, 사회적으로 발전하기 힘든 상황이었고, 그러한 가려운 부분들을 선교사들이 시원하게 긁어주며, 재정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도움을 주었는데, 한국교회가 재정적으로 자리를 잡고 그들이 전달한 신앙이 한국의 토착문화와 정착하여 한국만의 정서에서 신앙을 만들어가자 선교사들의 역할은 줄어만 갔기 때문이다.
ⅱ) 선교사 알렌
한국에 온 첫 개신교 선교사들은 자신의 선교지역의 정치적 상황에 연루되는 것이나 본국의 외교 업무에 이용되는 것, 심지어 선교본부 내부의 정치에 연루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알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알렌이 의욕적인 주한 미국공사가 되었던 이유는 두가지 였는데 첫째로는 주한 미국 공사였던 푸트 제독과의 개인적 대립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알렌에 뒤이어 들어오는 선교사들, 특히 조선에 임명된 첫 목사 선교사인 호레이스 언더우드 와 같은 선교사들과의 이념적 대립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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