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들의 선교활동 의료선교 아펜젤러 선교활동 선교 교육사업 선교 청년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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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目 次
Ⅰ. 의료선교
Ⅱ. 아펜젤러의 선교활동
Ⅲ. 교육사업
Ⅳ. 청년운동
Ⅴ. 신분 평등화 운동
Ⅵ. 성경번역
Ⅶ. 우리말성경 번역의 인물
Ⅷ. 주일학교
Ⅸ. 찬송가 출판과 문서 사업
Ⅹ. 초기내한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
. 네비어스 선교 정책의 채택
. 초기한국교회 급성장의 원인
● 부 록
Ⅰ. 의료선교
1. 내용
한국 의료선교의 역사는 1884년 9월 20일 의료선교사 알렌(H.N. Allen)이 미국 공사관 공의로 한국에 입국하면서 시작되었다. 앞서 1884년 6월~7월에 한국을 다녀간 매클레이 (Robert S Maclay) 목사가 한국정부로부터 의료와 교육의 허가를 받은바 있다.
알렌은 영국, 중국, 일본 영사관등의 공의도 겸임하였다. 알렌의 의료선교는 1884년 12월 4일의 갑신정변을 계기로 더욱 본격화되기 시작 하였는데, 개화파의 주요인물인 박영효, 김옥균, 서광봄, 홍영식 등이 신흥국가 일본의 새 문물을 도입하여 고루한 종래의 제도를 바꾸기 위하여 수구파를 제거하고자 일으킨 것이 갑신정변이었다. 이 때 민비의 조카인 수구세력의 거두 민영익은 몸에 7군데나 칼을 맞는 부상을 입어 동맥이 끊기는 중상을 입고 출혈이 심하여 생명이 위독하게 되었다. 한국 정부의 외무협판(외교관) 묄렌도르프 (P.G. von Mollendorff)를 통하여 알렌이 응급수술을 하게 되었고, 치료하는데 성공하였다.
갑신정변 직후 시국은 너무나 불안하여 신변의 위험을 느낀 외국인들은 모두가 서울을 떠 나고 있었다. 이 때 알렌은 남으면서 [나는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며 또 갈 수 있다하여도 가지 않겠다]라는 비장한 말과 함께 사생결단하고 치료에 임하였다. (The Foreign Missio nary for March,1885,P429) 이를 계기로 서양 의술의 탁월함은 한국인들 사이에서 인정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궁중의 신임을 얻어 그는 국왕의 시의가 되었다.(Charles A.Sauer,Whithin the Gate, P97)
알렌은 병원설립요청을 하여 가납되었고, 고종은 한성 북쪽에 있는 홍영식의 저택(갑신정변의 주모자로 사형이 집행되어 그의 집은 몰수되어 있었다)을 하사하였으며 이름도 ‘광혜원’이라고 지어주었다. 그리하여 1885년 2월 29일에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 개설되고, 4월 23일에는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의 ‘제중원’이라고 개칭하였다.
1885년 4월에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내한에 이어 5월 3일에 입국한 감리회 의료선교사 스크랜톤(Wm B. Scranton), 6월 21일에 헤론 의사가 입국하여 부족한 일손을 도와 제중원에서 함께 일하게 되었다. 알렌의 보고에 의하면, 의학교육은 1886년 3월 29일에 시작되었으며 시험을 거쳐 16명의 학생들이 선발되고 교육받았다. 1887년 9월, 알렌은 그 해 신설된 주미 한국 공사관의 서기관으로 부임하였고 이에 따라 헤론이 제중원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1886년 7월 4일에 엘러즈(Annie J.Ellers)간호사가 입국하여 제중원 내에 부녀과를 신설한다. 1888년에는 엘러즈의 후임으로 의학박사 홀튼(Lillias S. Horton) 양이 부임, 제중원의 부녀과를 맡는 한편 정동과 모화관에 있는 진료소를 맡는다. 그녀는 선교사 언더우드와 결혼하였다. 헤론은 1890년 7월 26일에 이질로 순직한다. 후에 하디(R. A. Hardie)가 잠시 맡았다가 1891년 4월에 도착한 빈턴(C. C. Vinton)이 제중원의 책임을 맡는다. 그는 복음전도의 효율성을 위해 이듬해 9월부터 자택진료소를 함께 운영한다.
스크랜톤은 1885년 6월 24일 제중원을 사임하고 9월10일 정동 자신의 집에 임시 진료소를 개설하였다. 1886년6월 시설을 갖춘 병원을 마련했으며, 한국의 남녀내외법을 고려하여 여자들을 위해 별도의 건물을 마련하여 여자입원실(15병상)도 꾸몄다, 이에, 고종은 1887년 이 병원에 ‘시(施)병원’이라는 이름을 지어 하사했다. 시병원은 첫 민간 병원이었다. 치료비는 대부분 받지 않았다. 스크랜톤은 1894년 병원을 남대문 근처 빈민지역인 상동으로 옮겼다. 상동으로 옮긴 시병원은 약국을 개설하면서 전도하기 시작했고, 직원들의 예배가 발전해 지금의 상동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스크랜톤의 요청에 북감리회 여성 해외선교부에서 하워드(Meta Howard) 양을 파견하여 1887년 10월 31일에 도착하였고, 서울 정동(貞洞) 이화학당에 전문 여성병원을 구내에 개설하였다.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의 전신이다. ‘보구여관’ 이란 이름을 명성황후가 하사하였고, 하워드가 건강문제로 2년 후(1889년 9월)에 귀국한 뒤에는 셔우드(Rosetta Sherwood)양이 1890년 10월 14일에 입국, 최초로 여성 의학교육을 실시하였다. 북감리회 선교본부에서 1889년 맥길을 파견하여 정동의 시병원에서 스크랜톤과 함께 일하다가 1890년 가을에 남대문로에 진료소를 개설한다. 1890년 스크랜톤이 자신의 안식년 휴가에 대비하여 1891년 12월에 홀이 내한한다. 이들은 여행을 하며 의료와 전도에 나서기도 하였다. 북감리회 선교병원에서는 1890년경부터 특별 종교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정동병원은 1894년에 상동으로 이전하였다.
홀은 셔우드와 결혼하였으나 1895년 11월 24일에 발진안티푸스로 사망한다. 이에 셔우드는 남편을 기념하기 위하여 평양에 1897년 2월 1일에 기홀병원을 설립한다.
1892년에는 미국 볼드윈 여사가 한국 여성운동과 의료사업을 위해 기부한 자금으로 동대문 분원인 볼드윈시약소(Baldwin Dispensary)를 설치, 여성 의료사업의 폭을 넓혔다. 1903년 간호사 M.J.에드먼드가 보구여관에 간호양성소를 설립한 뒤 1906년 세브란스병원 간호양성소와 합쳤고, 1912년 동대문에 현대식 건물을 준공해 해리스기념병원(The Lillian Hais Memorial Hospital)이라 부르다 1930년 동대문부인병원을 거쳐 1945년 이화여자대학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개칭하였다.
1893년 11월부터 선교사 에비슨(O. R. Avison)이 캐나다로부터 도착하여 빈턴을 대신하여 제중원장에 취임는데, 뒷날 세브란스병원, 세브란스의 학교, 연희전문학교의 책임자이다.
그는 제중원 소속 한국 관리들의 심한 부패를 보고 항의함으로 병원의 운영권이 미북장로회 선교부로 이관되어 명실공히 선교병원이 되었다. 이와 함께 미북장로회는 부산, 평양, 대구등에서도 의료선교를 전개하였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미북장로회는 지역마다 선교병원을 설치하면서 기존의 병원들을 현대화하고, 연합화 하는 선교전략에 따라 세브란스병원이 1904년에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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